2
부산메디클럽

정준모의 한국미술과 부산 <6> 눈물의 40계단

월남화가들 걸인같은 척박한 피란살이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9-26 20:09:28
  •  |  본지 21면
  • 트위터
  • 페이스북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잊기 위해 작가들은 그림을 그렸다. 피란시절 부산에서 헌병과 실랑이를 벌인 후 이중섭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MP'라는 작품.
대개의 월남화가들의 피란은 광복 후, 해방공간, 1·4 후퇴 시 대거 이루어졌다. 일제 강점기 또는 광복 후 서울을 중심으로 남한에서 살았던 북한 출신으로는 김병기 도상봉 이종우 권옥연 김세용 김흥수 이달주 박고석 박성환 박영선 등이 있다. 이들은 잠시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종군화가 자격으로 고향땅을 밟았지만 이내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졸지에 고향을 떠난 월남 미술인들은 스스로 살 길을 마련하고 피란민이라는 불안한 신분을 지켜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월남미술인회라는 모임이 발족된 것은 1·4 후퇴 직후인 1951년 2월 부산에서의 일이다. 하지만 월남 미술인전이 먼저 열린 곳은 대구의 미국공보원이었다. 이 전시에는 윤중식 황유엽 문선호 김형구 등이 출품했고, 당시 부산에 있던 월남미술인 박고석 최영림 장리석 이중섭 한묵 정규 등도 대구까지 작품을 내러갔다.

월남미술인회는 부산에서 출범하면서 "자유분방하여 일찍이 통제적이고 일률적인 공산치하의 예술정책으로서는 보지 못하던 자유스러운 전람회"를 열고자 했다. 그들은 전쟁 중임에도 같은해 11월15일부터 21일까지 부산의 국제구락부에서 전국문화단체 총연합 북한지부 주최로, 문교부 반공통일연맹 국민사상연구원 미국공보원 그리고 각 언론사가 후원하는 대규모 공모전시를 개최했다.

공모부문은 회화, 조각, 공예, 응용미술 분야를 망라했다. 50호 이내, 3점 이내로 출품작을 규정하고 국무총리상, 문교부장관상, 문총위원장상, 미공보원장상을 두었다. 심사위원은 이중섭 윤중식 김병기 한묵 그리고 미국대사관에서 일하던 문정관 브루노(Bruno)가 맡았다.

출품 작가는 최영림 유석준 김형구 조동훈 남창녕 황염수 정규 한상돈 황유엽 신석필 문선호 강용린 등이었다. 문교부장관상은 강용린에게 돌아갔다. 평양미술학교 재학 중 피란 온 황용엽은 군대에 입대했다가 1951년 중부전선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던 중 월남한 형제들을 만났다. 1953년 상이군인으로 퇴원한 황용엽은 미군부대 앞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며 연명한다. 불행히도 1953년 환도 직후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부산에 몰려온 화가들은 전쟁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밀다원과 같은 다방은 작가들이 서로의 안부를 물을 수 있는 만남의 장이었고, 이런 저런 일거리를 얻을 수 있는 노동시장이었다. 피란지 부산의 삶은 척박하고 비참했다. 당시의 기억을 김훈은 이렇게 회고한다.

'피란길의 열차에 섞이어 무턱대고 부산으로 내려오기는 하였으나 의지가 없는 나는 도착하는 날부터 밤이면 40계단 밑에 있는 과일도매시장 공지에서 북데기를 뒤집어쓰고 아무렇게나 쓰러져 자고, 낮이면 힘없는 다리를 끌며 거리를 쏘다니지 않으면, 마담의 눈치를 살펴가며 다방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신세였다. 그때 나에게 '직업적 걸인'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었다면 오직 깡통을 차지 않았다는 것과 나의 얼굴이 사치하도록 창백했다는 것뿐일 것이다.(중략) 빵 한 조각 살 돈이 없는 나에게 화구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렸다. 쉬지 않고 그렸다. 나의 상상 속에 캔버스를 펴놓고 어지러운 현실의 제상을 무수히 데생하였다. 나로 하여금 아직도 이 세상에 남아 있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제작 의욕뿐이다.'
   
가난과 절망이 가득한 공황 속에서도 그들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무턱대고 그렸다. 마치 그리지 않는 생활은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듯이. 전란임에도 불구하고 동인전이나 단체전 등 많은 전시가 진행되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처럼 비참한 상황에서 화가들이 그림 도구를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구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화가들의 사정을 알고 있었던 미국 문화원 문정관 브루노의 배려로 화가들이 재료 걱정없이 작업할 수 있었고, 어떤 이들은 아껴서 환도 후까지 사용했다고 한다.

국민대 초빙교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실장

[국제신문 공식 페이스북] [국제신문 인스타그램]
  • 기사주소복사
  • 스크랩
  • 인쇄

건강한 부산을 위한 시민행동 프로젝트
많이 본 뉴스 RSS
  • 종합

  • 정치

  • 경제

  • 사회

  • 스포츠

남해군청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
스토리 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