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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의 세계 영화제 기행 <28> 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

구소련 붕괴 이후 옛 명성 되찾은 동구 최고의 영화제

공산정권 하에서 크게 위축됐다가, 1993년부터 세 인물 주축이 돼 변화 모색

A급 영화제로 당당히 복귀

PIFF 창설이후 한국영화도 꾸준히 소개됐지만 올해는 세편 그쳐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0-07-20 20:26:15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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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 본부와 주극장이 있는 '테르미날'.
체코의 카를로비바리(Karlovy Vary)는 동유럽의 대표적인 온천휴양지다. 134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4세가 사슴사냥을 하러 왔다가 온천을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카를로비바리'로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말로 풀면 '카를의 온천'이란 뜻이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2시간 남짓 동쪽으로 달리면 인구 5만4000여 명의 카를로비바리에 도착한다. 도시 중심을 안아 흐르는 테플라강, 외곽에 있는 오흐르제강의 침식으로 형성된 깊은 계곡, 가파른 언덕에 병풍처럼 들어선 호텔과 레스토랑, 휴양시설과 주택들은 이곳이 휴양지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테플라강 옆 여러 개의 돌기둥으로 건조된 백색의 믈린스키 콜로나다(휴양시설을 뜻함)를 비롯해 브지델니, 트르지니, 사도바 등의 콜로나다는 연중무휴 요양과 치료를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카를로비바리는 영화의 시작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동유럽의 도시다. 뤼미에르 형제가 '기차의 도착' 등 10편의 영화를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첫 상영회를 가진 해가 1895년 12월 28일이다. 이듬해인 1896년 7월 15일에는 카를로비바리 문화회관(지금의 스파3동) 중앙 홀에서 정장을 한 체코 상류사회의 신사 숙녀들과 리본을 단 지방 유지들 수백 명이 모여 뤼미에르의 영화를 봤다. 그들이 촬영한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가족의 아침식사', '기차의 도착', '카드놀이',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장면' 등을 하루에도 몇 번씩 일주일간 상영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체코에서 처음 열렸던 이 행사는 체코영화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역사적인 대사건이었고, 30년 후에는 드라호미라(Drahomira)와 파사즈(Pasaz)에서 각각 극장 문을 열었다.

   
이창동 감독, 배우 설경구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뒷 배경은 영화 '박하사탕' 거리 배너.
카를로비바리가 갖고 있는 빼어난 경관은 일찍부터 체코의 영화감독은 물론 전 세계 감독들로부터 가장 선호하는 영화 촬영장소로 간택되었다. 체코가 배출한 세계적인 영화감독 구스타프 마하티(1901~1963)의 '에로티콘'(1929), 마르틴 프릭의 '유리잔 속에 달걀 세 개'(1937)는 이곳에서 촬영하고 이곳에서 첫 개봉한 영화들이다. 이후에도 많은 영화와 TV시리즈 등이 카를로비바리에서 촬영되었다. 이처럼 오랜 영화적 전통과 역사를 배경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에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가 출범하게 된다. 이 영화제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어 왔다면 올해로 65회를 맞아야 하지만, 공식적인 나이는 45세이다. 그만큼 이 영화제는 파란만장한 역경을 거쳐왔다.

첫 영화제는 1946년 8월 1일부터 15일까지 15일간 카를로비바리와 인근의 마리안스케 라즈네에서 열렸다. 마리안스케 라즈네도 카를로비바리 못지않게 아름다운 온천휴양지다. 프랑스의 거장 감독 알렝 레네가 만든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란 영화의 '마리앵바드'는 마리안스케 라즈네의 독일어 명칭 마리엔바트를 프랑스식으로 읽은 이름이다.
첫 영화제는 '필름 쇼'의 형태로 열렸고, 거장 감독들의 영화를 중심으로 7개국 13편의 장편과 22편의 단편영화를 초청하여 관객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48년 제3회 영화제부터 장편과 단편부문에 시상제도를 채택했지만 불행하게도 1948년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카를로비바리영화제는 영화선정은 물론 시상과 게스트초청까지도 정권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 영화제는 서방세계에 대한 이념투쟁이나 선전도구로 이용되기 시작했고, 1953년과 1955년에는 중단되기도 했다.

   
에바 자오랄로바 집행위원장
1956년 개최된 제9회 영화제는 다시 프랑스 이탈리아 등 서구영화와 제3세계 영화들을 초청하게 되었다. 세계영화제작자연맹(FIAPF)은 카를로비바리영화제를 A등급으로 분류했다. 그런데 1959년 제1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가 출범하면서 이 영화제는 또 한 번 수난을 겪게 된다. 세계영화제작자연맹이 사회주의국가에서 개최되는 영화제 중 A급 영화제는 일 년에 하나만 허용한다는 원칙을 내세우자 구소련은 체코에 압력을 행사하여 이 영화제를 새로 출범한 모스크바영화제와 교차하는 격년제 방식으로 운영하게 했다. 이에 따라 1958년 제11회영화제 이후에는 1960년에 12회, 1962년에 13회 등 격년마다 영화제가 열렸다.

1991년 8월 구소련이 붕괴되자 카를로비바리영화제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93년 11월 17일 체코 문화부와 국민배우 이리 바르토스카, 그리고 푸프그랜드호텔이 주축이 되어 이 영화제 재단을 발족시키고 1994년까지 격년제로 개최하던 영화제를 199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영화제로 환원시켰다. 이렇게 해서 이 영화제는 35년 만에 옛날의 명성을 되찾고 명실상부한 A급 영화제로 복귀하였다.

이처럼 파란만장한 역사 속에는 세 명의 주역이 버티고 서있다. 1993년부터 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는 이리 바르토스카는 체코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다. 1947년에 출생한 그는 체코 브루노에 있는 야나첵 연극학교를 졸업했으며, 1970년대에는 프라하의 자브라들리극장에서 '맥베드' '햄릿'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의 작품을 통해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며 유명세를 올렸다. 1993년에는 이 영화제 재단설립을 주도했고, 재단이 설립되면서 이사장을 맡아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던 영화제를 활성화시켜 옛날의 명성을 되찾게 했다. 다만 이리 바르토스카 이사장은 재단을 마치 개인소유의 회사처럼 운영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또 한 사람은 에바 자오랄로바이다. 1932년생인 에바 여사는 체코의 찰스대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체코문학을 전공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0년대 초에 영화잡지 키노와 '필마 도바(Film a doba)'의 편집장으로 주요 일간지에 영화평을 게재하는 등 체코의 대표적인 영화평론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에바 자오랄로바 여사는 이 영화제 재단 설립 당시 프로그램 디렉터로 이리 바르토스카와 함께 참여했고, 1995년부터 16년째 집행위원장을 맡아 영화제를 이끌고 있다.

   
율리에타 자하로바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최근 결혼과 함께 시클(Sickel)로 성을 바꾸었다.) 빼어난 미모에 영어, 독일어,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그녀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대학에서 독어와 영미문학을 전공한 후 체코 찰스대학에서도 영화이론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영화평론가와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스승인 에바 여사와 함께 영화제에 들어와 프로그래머를 거쳐 프로그램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는 1999년 이후 매년 부산국제영화제를 방문하여 한국영화를 선정해왔다. 카를로비바리영화제는 동유럽을 대표하는 영화제였지만 한국영화는 체코와 한국의 국교가 수립된 이후에서야 우리 영화가 진출할 수 있었다.

1992년에 박광수 감독의 '베를린 리포트'가 처음으로 이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초청되었지만 이후에는 단절되었다가 부산국제영화제가 창설되면서 '세친구'(임순례·1997), '초록물고기'(이창동·1998), '모텔선인장'(박기용·1998), '파란대문'(김기덕·1999) 등이 초청되기 시작했다. 1999년 프로그래머인 율리에타 자하로바가 부산을 찾기 시작하면서 한국영화의 진출은 늘어나기 시작했다. 2000년에는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 등 세 편이 독립영화포럼에, 이두용 감독의 '애'와 이명세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색다른 시선 부문에 상영되었고,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경쟁부문에 초청받아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특히 2001년에는 '뉴 코리안 시네마'라는 제목으로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춘향뎐'(임권택), '거짓말'(장선우) 등 30편과 함께 박철수 감독의 '봉자'가 경쟁부문에서 상영되었다. 이후 한국영화는 꾸준하게 이 영화제에서 상영되고 있다.

필자는 1996년 이후 해외에서 에바 집행위원장과 율리에타 프로그래머와는 자주 만나 친해졌는데 올해 율리에타 프로그래머가 사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무척 아쉬웠다. 그들 사이에 있는 갈등이 밖으로 불거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율리에타의 사임 탓인지, 올해 영화제에 소개된 한국영화는 '시'(이창동), '폭풍전야'(조창호), '파주'(박찬옥) 세 편에 그쳤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아쉬움을 달랬다.

올해는 오랜 기간 정치적 과정 속에서 위축되던 영화제가 좀 더 활성화되지 못하고 물러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 해였다. 영화제에는 수많은 영화들이 상영되지만 영화를 만들고, 즐기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영화제 또한 사람들이 가꾸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슬기롭게 넘겼던 것처럼 카를로비바리영화제가 동구권 최고의 영화제로서 안정되기를 희망한다.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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