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섬'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섬'에 갇힌 우리 이웃들은 아파트와 울타리로 둘러싸인 채 기본적인 복지 혜택도 누리지 못했다. 또 이들의 주거지는 철저히 가려져 주변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서는 찾아가기도 쉽지 않았다.

본지 취재팀은 2000년과 2009년 부산지역 읍·면·동별 기초생활수급자(이하 수급자) 전수 조사를 통해 드러난 빈곤층 밀집지역을 20일 현장 취재했다. 빈곤층 주민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회복지연대 박민성 사무처장이 동행했다.


■ 부산진구 당감2동 재개발 예정지

- 절반 헐린 위험한 집서 노부부 생활

	재개발 예정지인 부산 부산진구 당감2동 빈민촌에 지붕이 내려앉고 담장이 허물어진 노후불량 주택들이 어지럽게 늘어서 있다. 인근 대규모 아파트들과 주거지 분리 현상을 보이고 있는 이곳에는 기초생활수급자와 장애인들이 모여 살고 있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이날 오후 부산진구 당감2동 재개발 예정지. 아파트 숲을 지나 막다른 도로에 다다르자 비로소 낙후된 빈곤층 주거지가 눈에 띄었다.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조차 찾기 어려웠다. 어른 무릎 높이의 담장을 넘어서자 지붕이 내려앉거나 벽이 무너진 집들이 어지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심한 악취가 풍겼다.

대문조차 없고 마당에는 줄잡아 500~600여 개의 막걸리통이 널브러져 있는 집에 들어섰다. 마당에서 개를 돌보고 있던 김모(61) 씨는 취재팀을 보자마자 버럭 화부터 냈다. "필요 없어. 나가！"

인근 주민들에게 김 씨의 사연을 엿들을 수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선원이었다. 병이 생겨 기운이 없어지자 부인과 가족이 떠났고, 그는 이곳에 홀로 정착했다. 매달 나오는 수급비가 수입의 전부다. 가족과 멀어지고 빈곤 주거지에 고립되면서 그의 마음에도 거대한 장벽이 생겼다.

박 사무처장이 "아이고, 개밥이라도 좀 사올 걸 그랬네"라고 말을 건네며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졌다. 쪽방에는 누울 자리는 물론 앉을 공간도 없었다. 대여섯 마리 개들이 김 씨 옆에서 짖어댔다. "요즘 건강은 좀 괜찮으시냐"는 박 사무처장의 질문에, 그는 "그냥 가！ 뭐 하려고 왔어. 이렇게 살게 내버려 둬"라고 날카롭게 반응했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미로 같은 골목을 빠져나왔다. 도로를 경계로 대규모 아파트와 마주하고 있는 이 마을 뒤쪽을 살폈다. 놀랍게도 도로변 주택들은 칼로 두부 자르듯, 집 절반이 잘려나가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파트가 생기고 도로가 뚫리면서 집이 반쪽이 된 것이다. '설마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런 집에 사람이 살까'라고 생각하는 순간, 노부부가 대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뒷짐을 지고 옆을 지나던 노인이 한마디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여기 아니면 갈 곳이 없어."

당감2동 빈민촌 주민들은 이웃을 경계하고, 심지어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이들 주민은 인근 아파트 입주민들이 산책로로 사용하는 마을 위쪽 도로에 '남의 창문 뒤에서 운동하지 마시오' '개를 몰고 와서 우리집 뒤에 ○을 싸게 하지 마시오' 등 각종 경고판을 붙였다. 빈곤층의 사회적 단절을 여실히 보여줬다.


■ 사상구 주례2동 빈민촌

- 경로당 등 복지혜택 꿈도 못꿔

	부산 사상구 주례2동 빈곤층 주거지 내 골목길에 빨래가 널려 있다. 박수현 기자

같은 날 사상구 주례2동 빈민촌. 가야로 육교 바로 아래에 자리한 이곳은 위치로 보자면 '반지하'에 해당한다. 실개천을 중심으로 움푹 패인 공간에 쪽방들이 줄지어 있었다. 이 마을 위에는 대단지 아파트들이 병풍처럼 늘어서 명확한 경계를 짓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만난 박모(여·48) 씨와 평상에 앉아 쉬고 있던 최모(여·91) 씨는 원래 이곳 출신이 아니었다. 박 씨는 지난달 인근 주례1동에서 이사왔고, 최 씨는 10여 년 전 동구 초량동에서 옮겨왔다. 이들의 이전 주거지 역시 수급자들이 밀집한 지역이다. 빈곤층의 주거 이동이 극히 제한돼 있는 것이다.

이 마을에는 홀로된 80~90대 노인들이 많았다. 이들 노인의 소일거리는 '평상 옮겨 다니기'가 전부다. 마을 골목 양쪽에 각 평상이 놓여 있는데, 노인들은 해가 뜨는 위치에 따라 평상을 옮겨 다니며 하루를 보낸다.

최 씨가 사는 쪽방 문을 열어봤다. 방에는 전기장판과 전기밥솥, 생수 한 병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시멘트 바닥의 부엌에는 수도꼭지 하나만 덩그라니 달려 있었다.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주례2동 빈민촌에는 기본적인 생필품 공급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마침 노인들의 손톱을 깎아주고 있던 요양보호사 이모(여·51) 씨가 쪽방 안으로 발을 들여놨다. 이 씨는 "아무리 못 사는 동네라지만, 하다못해 조그만 슈퍼마켓도 없다"며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은 쌀 한 줌, 마실 물 한 병 구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또 "노인들이 이렇게 많이 사는데 경로당은커녕 노인을 위한 복지시설은 전무하다"며 "고소득층과의 주거지 분리뿐만 아니라 복지 혜택의 차별이 심각한 수준"이라고 하소연했다.


■ 사상구 학장동 영구임대아파트

- 보도블럭 색깔도 일반과 달라

이날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사상구 학장동 영구임대아파트다. 이 아파트로 출입하는 도로 한쪽은 철제 울타리로 막혀 있다. 1993년 입주 당시만 해도 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이삿짐 차량이 오가던 뚫린 도로였다. 그러나 이듬해 바로 옆에 분양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울타리가 쳐졌다. 이 때문에 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 간 교류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다.

철제 울타리 설치를 두고 아직도 임대아파트 주민들 사이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임대아파트 주민 안모(여·65) 씨는 "임대아파트와 섞이게 되면 집값이 떨어진다고 울타리를 쳤다는 얘기도 있고, 분양아파트에 도난사고가 잇따랐는데 범인이 임대아파트 주민이라고 의심해 그랬다는 설도 있다"며 "어쨌든 저쪽(분양아파트) 사람들에게 우리가 좋아 보이지 않는가 보다"고 씁쓸해했다.

도로가 막히면서 길 중앙에는 철제 말둑도 박혔다. 쓸모없는 길이 되다 보니 대형 차량들의 불법주차가 극성을 부렸던 것이다. 특히 도로 양쪽의 보도블럭 색깔도 다르다. 임대아파트 쪽은 녹색, 분양아파트 쪽은 붉은색이다. 서로 간 경계가 분명하게 나눠진 것이다. 학장복지관 류승일 부장은 "기능을 잃은 도로가 계속 방치되는 것이 안타깝다"며 "차라리 복지시설을 짓는다든지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임대아파트 주민 김모(여·60) 씨는 "이웃에 사는 총각이 어렸을 때부터 이곳에서 자라 이제 성인이 됐는데 며칠 전 '여기 살면 장가도 못 가요. 빨리 이사 가야 하는데…'라고 하더라"며 "임대든 분양이든 간에 함께 잘 살 수 있는 동네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 경조사 등 이웃간 교류도 드물어

고립된 빈곤층들은 내면에 두꺼운 장벽을 쌓고 있었다. 사회로부터 분리되고 보장받는 것이 없는 만큼 사회에 대한 관심도 멀어져만 갔다.

이 같은 사실은 부산복지개발원의 '2009년 부산지역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민의 주거 및 생활실태 분석' 설문조사에서 드러났다. 이 조사는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민의 사회통합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 415명을 표본 추출해 진행했다.

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47.9%가 지역사회에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 '별로 관심이 없다'고 답했다. '관심은 있지만 참여하고 싶지 않다'거나 '참여하지 못한다'는 답도 47.4%로 높았다. 반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민은 4.2%에 불과했다.

이웃 간 교류도 드물었다. 이웃의 경조사에 참여하는 비율은 '전혀 안 한다'와 '거의 안 한다'가 65.6%에 달했다. '가끔 한다'와 '자주 한다'는 비율은 각 11.5%와 1%였다. 생활용품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비율에서도 '전혀 안 한다'와 '거의 안 한다'는 응답이 65.6%를 차지했다.

영구임대아파트 입주민들은 홀로된 경우가 많았다. 72.4%가 배우자가 없었고 이 가운데 49.8%는 사별, 15%는 이혼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초생활수급자 비율은 64.3%로 높았다.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의 이웃 관계 실태 (단위 %) 구분 전혀 안 한다 거의 안 한다 보통이다 가끔 한다 자주 한다 집을 비울 경우 자녀를 맡기거나 집을 봐줄 것을 부탁한다 47.2 28.1 12.5 11.5 0.7 이웃의 경조사에 참석한다 34.5 31.1 13.4 20 1 생활용품을 빌리거나 빌려준다 37.3 28.3 14.6 18.5 1.2 한가할 때 담소를 나눈다 26.2 23.5 17 25 8.3 ※자료:부산복지개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