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로벌리즘 추구했던 세계
- 최근 자국 중심주의로 변모
- 88올림픽 구호 ‘벽을 넘어서’
- 지금 한반도에 여전히 유효
- 평화공존 해법 찾아나가야

1988 서울하계올림픽이 동서 냉전의 종식을 이끌었다면, 그로부터 꼭 30년 뒤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한반도의 평화 역사를 새로 쓰는 전환점이 됐다. 서울올림픽의 구호 ‘벽을 넘어서’가 다시 한번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 까닭이다. 당시 개·폐막식 총연출을 맡았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석학’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당시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벽을 넘어서’는 이념뿐 아니라 남녀 빈부 등의 벽을 허물자며 세계에 보낸 메시지였다. 요즘 융합, 통섭이라고도 불리는 ‘원융(圓融)’이 바로 그것. 현재 ‘또 다른 벽’ 앞에 선 한반도에 이 구호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한다.

지난 23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영산대 해운대캠퍼스에서 열린 ‘와이즈유 건학이념 춘계학술대회’에 참석한 이어령 전 장관이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 서정빈 기자

지난 23일 부산 해운대구 영산대학교에서 열린 ‘제16회 와이즈유 건학이념 학술대회’에서 만난 이 전 장관은 다시 한번 패권 다툼의 최전선에 놓인 한반도에 융합의 철학과 전략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지정학적으로 미국 일본 등은 해양세력(Sea Power)이고 중국 러시아는 대륙세력(Land Power)이에요. 팽창하는 양대 패권이 맞부딪치는 곳이 한반도입니다. 피할 수도 없어요. 남북의 벽을 넘어 또다시 우리 앞에 놓인 문명의 벽을 걱정해야 합니다.”

해양·대륙세력의 대립과 한중일 패권다툼 속에서 공존할 수 있는 해법은 없을까. 이 전 장관은 양자선택의 이항대립을 가위바위보의 삼항순환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때 글로벌리즘을 얘기했던 세계가 이제는 자국중심주의로 변화하고 있어요. 가위는 보를 이기고 보는 바위를 이깁니다. 가위바위보 문명론에서 패권이란 없는 거죠. 영산대 건학이념이 원융무애(한데 통하여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상태)입니다. 제 철학과 닿아 있죠.”

이날 ‘사고의 벽을 넘어서:상상력과 창의력’이라는 주제로 무대에 오른 이 전 장관은 서울올림픽을 경험한 세대로서 평창동계올림픽을 치러낸 현세대에게 전하는 메시지로 강연을 펼쳤다. 그는 “서울올림픽은 대한민국이 더는 중국, 일본에 종속된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세계에 각인시킨 이벤트였다”며 “세계인의 축제로 만들기 위해 ‘손에 손잡고(hand in hand)’를 주제곡으로 발표했는데, 1년 뒤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그곳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부를 정도로 평화의 상징이 됐던 노래다”고 설명했다.

굴렁쇠 소년에 대한 이야기도 빠지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외국에서는 한국하면 폐허 속에서 깡통을 들고 구걸하는 ‘전쟁고아’가 즐비한 나라로 인식됐다. “하얀색 운동복을 입은 소년이 넓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굴렁쇠를 굴리는 모습은 아주 강렬했죠. ‘여백의 미’는 한 폭의 한국화 같았고요.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는 한국을 보여준 상징적인 퍼포먼스였습니다.”

이어 “앞으로 인공지능(AI) 시대에는 이러한 ‘감성’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이번 평창올림픽에 폐막식에서도 감성을 자극하는 ‘시적 상상력’이 주목을 받지 않았나. 정치 경제 사회를 뛰어넘는 문화의 힘으로 한중일 삼자순환의 시대를 이끌기 바란다”고 학생들을 응원했다.

1934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한 이어령 전 장관은 1956년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단한 후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1990~1991년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대표 저서로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생명이 자본이다’ 등이 있다.

최승희 기자 shchoi@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