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수단의 슈바이처’였던
- 이태석 신부와 어릴 적 친구
- 학창시절 땐 함께 음악활동
- 2주기 추도식 때 추모 독창도
- 50세 넘어 앨범 내자던 약속
- 애향심 담은 음반으로 지켜

“노래로 부산에서 우리를 당해낼 학생이 없었습니다. 친구지만 그때는 그렇게 큰마음을 품은 분인 줄 몰랐죠.”

오륙도패밀리 음반을 낸 윤선자 가수는 “어린 시절 이태석 신부는 자신을 낮추고 친구를 돋보이게끔 받쳐주는 친구였다”고 회상했다. 서정빈 기자

지난달 아프리카 남수단 공화국 15세 이하 유소년축구대표팀이 고(故) 이태석 신부의 묘소를 참배했다. 선수들은 ‘우린 극복하리라’와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합창하며 이 신부를 추모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기자는 이 신부를 추억할 또 다른 이야기를 들었다. 그와 학창 시절 음악활동을 함께했다는 한 향토가수의 소식이었다.

최근 ‘오륙도 패밀리’라는 제목의 가요 음반을 내고 향토가수로 데뷔한 윤선자(56) 씨. 15일 만난 윤 씨는 소문대로 이 신부와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줄 알았는데, 3학년이 되니까 선생님이 태석이한테 노래를 시키더라고요. 이인자로 밀려난 기분이 들었죠.”

윤 씨는 이 신부의 어린 시절 천재성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당시 그는 치기 어린 질투심이 발동해 이 신부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고 말했다. “늘 해맑게 웃으며 공부도 잘하는 친구였죠. 가야금 기타 피아노를 배우지 않았는데도 그냥 쳤어요.” 이 신부의 음악적 재능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성당에서 오르간을 홀로 익히고 첼로 색소폰 클라리넷 등도 독학으로 연주했으며 초등학교 시절 ‘성탄’ ‘둥근 해’ ‘작은 별’ 등 동요를 작곡했다. 이 신부의 대표적인 추모곡인 ‘묵상’도 중학교 시절 작곡됐다.

‘묵상’은 이 신부가 상급학교로 진학한 후 세상에 소개됐다. “태석이와 같은 천주교 신자이다 보니 10대 때 함께 성당 음악 활동을 했습니다. 고2 때 저를 포함해 4명이 데레사여고 강당에서 열린 팝 성가 경연대회에 나갔죠. 대회 전에 태석이가 ‘묵상’을 들려줬는데, ‘세계평화를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라는 가사를 듣고 핀잔을 줬던 일은 지금도 후회가 돼요.”

윤 씨는 솔리스트로서 무대에 서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대목을 선창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이 신부가 테너를 맡아서 윤 씨의 소프라노 부분을 받쳐줬다고 한다. “아직 신부님처럼 저를 잘 받쳐주는 하모니를 만난 적이 없어요. 그분은 노래할 때조차 양보하며 자기보다 친구가 돋보이게 만들어줬습니다.”

이후 공부를 잘한 이 신부는 의대에 갔고, 윤 씨도 음대에 어렵게 진학했다. 정신없이 살아가는 동안 세월이 흘렀다. 이 신부는 2001년부터 아프리카 남부 수단 와랍주 톤즈에서 의료봉사와 구호활동을 하며 일생을 바친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원주민을 치료하는 데 음악이 가장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아이들로 구성된 톤즈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악기를 가르쳤다. 밴드는 현지에서 명성을 얻어 정부 행사에 초청돼 공연도 했다. 또 이 신부는 2005년 남북 수단이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차 ‘슈쿠란 바바(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곡을 만들었다. 훗날 윤 씨와 함께 음악 활동을 했던 친구 4명 중 2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중에는 이 신부도 포함된다.

윤 씨는 2012년 이 신부의 2주기 추도식 때 묵상을 독창한 이후 한동안 공식적인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묵상은 가난한 사람들의 노래예요. 신부님은 이 노래를 통기타를 치며 부르길 좋아했죠. 그런데 공식 석상에서 불린 묵상은 화려한 밴드에 노래의 본질이 묻히는 것 같았습니다. 친구에게 좀 부끄러웠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난 7월 자신의 공식 첫 앨범을 냈다. 음악학원 원장과 노래 강사로 30년 가까이 살았지만, 자신과 지역사회를 위한 노래를 불러본 적 없다는 회한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똑똑한 친구들이 빨리 죽었어요. 4명의 친구와 50세가 넘으면 앨범을 함께 내기로 했던 기억이 났죠. 그래서 용기를 냈습니다.”

‘다섯 섬이 여섯 섬이 가족처럼 모여 있네. 정다운 모습. 우리는 한 가족 얼싸안고 웃어보자. 오륙도 패밀리’. 윤 씨의 걸쭉한 민요 톤 가락에 실린 가사가 오륙도의 천혜의 자연을 소개하며 애향심을 자극한다. 박건우 작곡가가 건전가요 형태로 만든 곡을 우연히 듣게 된 윤 씨가 트로트로 다시 작곡을 요청해 앨범을 냈다.

윤 씨는 “오륙도 섬들과 바다가 모두 하나인 것처럼 부산뿐 아니라 부산과 연관된 모든 지역의 시민이 가족이라는 뜻이 담긴 노래다. 열심히 활동해서 이 노래가 노래방 곡 목록에 실리고 야구장에서 애창되는 향토가요가 되게 하겠다”며 “그렇게 하면 하늘나라에 있는 태석이도 이 노래 괜찮네라고 칭찬해주지 않겠냐”고 포부를 밝혔다.

이승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