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 허(虍-6)말 이을 이(而-0)아닐 불(一-3)다할 굴(尸-5)

노자가 ‘이름’을 문제 삼은 것은 그 이름이 사물이나 현상을 規定(규정)함으로써 限定(한정)해버리기 때문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인식이나 사유 또한 한정되고 고착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문명은 그런 이름들과 규정들 위에서 구축된 것으로, 편리함과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우리의 몸과 생각을 옴짝달싹 못 하게 하고 한 곳으로만 시선을 두도록 만들기도 한다.

문명은 모든 것과 곳에 이름과 번호 따위를 붙이며 空地(공지)도 餘地(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빈 곳은 不實(부실)을 의미할 뿐이다. 계획적으로 만든 공원조차 빈 곳이 아니다. 그 또한 욕망과 필요의 산물이어서 진실로 빈 곳은 아니다. 그런데 자연은 어떠한가? 거기에 따로 공원이 있는가? 자연에서는 삶과 죽음, 생산과 소비, 노동과 놀이가 자연스럽게 섞여 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도시나 사회에서는 그 모든 행위와 사태가 구획하여 규정한 곳에서 일어난다. 문명은 이렇듯 ‘비어 있는 곳’을 파괴하거나 제거해나간다.

노자는 말한다. “天地之間, 其猷橐籥與!”(천지지간, 기유탁약여!)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지 않은가!” 지금 우리는 저 하늘이 대기권이며 지표에서 1000km 정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829.84m)처럼 수백 미터나 되는 마천루를 올릴 수 있는 것도 그 덕분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 사이가 500m나 1000m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번 상상해 보라. 상상하는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지 않은가?

하늘과 땅 사이가 팔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깝다면, 과연 그 사이에서 이토록 다양한 생명체와 사물이 생겨나고 활기 있게 살아갈 수 있을까? 문명에 길든 사유와 인식으로는 그 ‘비어 있음’의 거대하고 지속적인 유용성과 효율성을 짐작조차 하기 어려우리라. 우주가 왜 광활한가? 빅뱅이 일어나고 블랙홀이 존재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노자가 풀무에 빗대어서 “비어 있으면서 다하지 않는다”는 ‘虛而不屈(허이불굴)’을 말한 것은 그게 우주와 자연, 인간의 공통된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리라.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