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기(八-6)같을 유(犬-9)풀무 탁(木-12)피리 약(竹-17)

다음은 ‘죽간본’ 12장이다. “天地之間, 其猷橐籥與! 虛而不屈, 動而愈出.”(천지지간, 기유탁약여! 허이불굴, 동이유출)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지 않은가! 비어 있으면서 다하지 않으며, 움직일수록 더욱 거세게 나오니.”

猶(유)는 ∼와 같다는 뜻이다. 橐籥(탁약)은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인 풀무를 가리킨다. 屈(굴)은 굽다, 굽히다, 다하다는 뜻이다. 愈(유)는 점점 더, 더욱이라는 뜻이다.

통행본 ‘도덕경’에서는 5장에 나오는데, 이 구절 앞에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천지불인, 이만물위추구; 성인불인, 이백성위추구)가 더 있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으니, 온갖 것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 성인 또한 어질지 않으니,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여긴다”는 뜻이다.

이 구절의 핵심은 ‘어질지 않음’에 있다. 천지도 성인도 어질지 않다는 것은 도 또는 자연에는 어질다느니 어질지 않다느니 하는 것이 애초에 없다는 뜻이다.

仁(인) 곧 어짊은 유가에서 가장 중시하는 덕이다. 다른 사람을 아끼고 위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서, 인간 세상에서만 제한적으로 가치를 갖는다.

이를 ‘도덕경’에서는 작위적이고 위선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인식을 나타내는 대목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위에서 제시한 ‘죽간본’ 12장 또한 그런 관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죽간본’에서는 이 대목이 빠져 있으므로 그런 관점을 견지해야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는 노자가 유가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매우 중요하다.

이미 거듭해서 말한 바 있듯이 문명은 관습적 사유나 통념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그게 문명의 질서를 효율적이고 정연하게 유지해 나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믿음 또한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런 믿음이 다양한 지식과 사상을 분류하고 범주화하는 작업을 객관적이며 타당하다고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 때문에 유가와 도가, 유가와 법가를 아무런 의심 없이 대립되거나 상반되는 관계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다.

고전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