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경제 항산항심] ‘현실’을 주도하는 ‘이론’은 세상에 없다

안병민 열린비즈랩 대표·‘주4일 혁명’ 저자

안병민 열린비즈랩 대표·‘주4일 혁명’ 저자
| 입력 : 2025-06-23 19:14:50
| 본지 18면

1798년 영국 자연사박물관. 호주에서 도착한 한 동물 가죽과 스케치. 존재 자체로 모순이었다. 너구리처럼 생긴 포유류인데 알을 낳고, 오리 같은 부리를 가졌는데 젖을 먹인다? 포유류의 정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존재. 사람들은 조작이라 일축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을 포용하려는 시선들이 있었다. 문제는 동물이 아니라 분류 체계였다. 오랜 기간에 걸친 격렬한 논쟁과 관찰, 반박이 이어졌다. 포유류 내 ‘단공류’라는 새로운 분류 체계가 만들어진 배경이다.

기존 체계가 포착하지 못하는 존재, 설명되지 않는 현상. 우리는 그것들을 오류라 치부하며, 기존 틀에 욱여넣는다. 틀린 정보라 단정하며 무시한다. 지적인 나태다. 삶에 대한 기만이다. 이론이라는, 안락한 감옥으로의 도피다. 이론이 우리 삶을 설명할 순 있지만, 우리 삶을 대신 살아줄 순 없다. 진짜 혁신은 이론의 바깥, 삶의 최전선에서 시작된다. 낡은 이론을 삶에 끼워 맞추는 게 아니라, 삶이 요구하는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는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내 앞의 현실과 자기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려는 용기가 바로 혁신이다.

과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19세기 말, 뉴턴의 법칙은 우주 전체를 완벽히 설명하는 무오류의 언어였다. 그러나 원자보다 작은 미시 세계에서 이 장엄한 질서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30년에 걸친 지적 전쟁이 시작됐다. “빛은 입자이자 파동이다.” “정확한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알 수 없다.” 뉴턴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관점에서는 말이 안 되는 가설. ‘정답은 없다, 확률만 존재한다’는, 불확실성이 기본값인 가설. 오해와 편견이 뒤엉킨 지적 투쟁 속에서 양자역학이 탄생했다. 기존 세계관의 붕괴 과정이었다. 오늘날 반도체 레이저 MRI(자기공명영상) 태양전지 등의 현대기술은 양자효과를 기반으로 돌아간다. 맞다, 이론은 현실을 뒤따라갈 뿐, 현실을 주도하는 이론은 세상에 없다.

비즈니스라고 다를까. ‘린 스타트업’은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빠르게 테스트하고 개선하는 방법론이다. 만들고(build), 측정하고(measure), 배우는(learn) 방식. 수많은 창업자가 공식을 신봉한다. 그런데, 에어비앤비는 달랐다. 그들은 ‘남는 방을 빌려준다’는 가설로 자신들의 아파트에 에어매트리스를 깔고 이침식사를 제공했다. 결과는? 처참한 실패. 공식대로라면 서둘러 폐기해야 할 비즈니스였다.

여기가 갈림길이다. 대부분은 여기서 돌아선다. 이론과 데이터가 틀렸다고 말하니 도리가 없다. 하지만 에어비앤비 창업자들은 달랐다. 실패를 빠르게 걸러내는 린 스타트업의 성공 공식을 따르지 않았다. 외려 시장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새로이 변화하고, 도전했다. ‘낯선 집’에 대한 고객 불안과 신뢰 부족 문제를 고품질의 전문 사진 서비스와 리뷰 시스템으로 해결했다. 현실에 기반한 유연한 전환.

그들이 성공한 이유? 이론을 잘 따라서가 아니다. 이론을 넘어서려 해서다. 이미 실패한, 수많은 스타트업들도 똑같은 공식을 따랐다. 진짜 차이?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두 발로 버티고 선 내 삶으로 이론을 극복하려는 의지였다. 삶을 ‘이론의 명쾌함’에 맞춘 것이 아니라, 이론을 ‘삶의 복잡성’에 맞추려 한 거다.

흔히 혁신을 문제 해결 방법론으로 이해한다. 그건 표피다. 혁신은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거다. 문제를 바라보는 틀을 다시 짓는 일이다. 이론이 아니라, 내 앞의 현실을 중심에 두는 것이다.

오리너구리는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간다. 달라진 것은 우리다. 새로운 이름, 새로운 체계, 새로운 이해. 세상을 보는 우리의 렌즈가 바뀐 것이다. 그래서 혁신은 ‘세상 재정의’다. 더 나아가 ‘나의 재정의’다. 이론의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설명되지 않는 내 앞의 현실을, 내 삶의 구체적인 경험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모시는 투쟁이다. 이론은 언제나 현실의 뒷자리다. 우리의 삶은 교과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세상의 위대한 혁신은 기존 이론을 전복시키며 나온다. 결국 혁신은 ‘내 삶의 주도권을 회복하는 싸움’이다. 그러니 물어야 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낯선 현실은, 어떤 새로운 이론을 요구하고 있는가?” ‘구체적인 내 삶’이 던지는 질문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 그가 세상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