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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메디클럽

[도청도설] 의자의 쓸모

  • 정상도 기자 jsdo@kookje.co.kr
  •  |   입력 : 2022-09-25 19:18:50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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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민주화의 격변 속에 무전여행은 젊은이의 로망이었다. 발길 닿는대로, 욕심껏 가고 싶은 데까지 가보자는 욕망은 갑갑한 사회 현실의 탈출구였다. 국토대장정 프로그램이나 해파랑길, 남파랑길 등 지금은 익숙한 걷기 인프라가 생기기 전이었다. 부산에서 출발해 지리산 넘어 하동에서 섬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광양 땅으로 접어들 때 화물차가 일으키는 흙먼지를 뒤집어 썼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1987년 봄 우연하게 시작한 무전여행은 그렇게 목포를 거쳐 서울로, 다시 강원도 강릉에서 부산까지 한 달가량 이어졌다. 기본적으로 하루 40㎞, 100리를 걷는 일정이었다. 기초지자체인 군과 군 소재지 사이 평균 거리가 그 정도였다. 온종일 걸어야 겨우 닿을 정도지만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한적한 도로에서 예의 바르게 (?) 손을 흔들며 지나던 차를 세우는 거다. 차를 얻어 타는 히치 하이킹이 가능했던 때다. 당시 가장 고가 승용차인 각진 ‘그라나다’부터 화물차까지 운전자들은 동생이나 조카 대하듯 자리를 내줬다.

그때 유일하게 히치 하이킹에 실패했던 차가 대우 르망이었다. 이 차의 콘셉트엔 무전여행객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요즘 말로 하면 성공한 도시인의 패밀리카. 부인에 자녀까지 태우고 나들이를 즐기기 위해 몰고 나오는 차다. 딱 한 번 도움을 받긴 했다. 소양강댐 올라가는 길이었다.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르망이 서더니 차창이 스르르 내려갔다. “이 길이 소양강댐 전망대 가는 길 맞아요?” 앞 좌석엔 젊은 부부가 타고 있었고, 뒷좌석엔 너댓살 쯤 되어보이는 애가 앉았다. 내심 옳타구나 싶었으나, 짐짓 무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재촉했다. 아니나 다를까, 경적이 울렸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뒷좌석에 올랐다. 르망 덕분에 청평사를 가봐야겠다는 로망을 이룬 순간이었다. 걸어갔다면 불가능한 여정이었다.

마이카 전성시대로 접어들던 무렵의 단면이다. 지금은 캠핑 전성시대이자 걷기 전성시대다. 걷기에 무슨 자동차냐 하겠으나 부산 오륙도해맞이공원에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770㎞를 한꺼번에 걷기보다는 형편대로 일정을 나눠야 하니 자동차가 필요하다. 걷기의 매력에 빠져 캠핑카를 장만한 지인 덕분에 지난 주말 캠핑족과 걷기족의 성지라는 경주시 나정고운모래해변에서 하루종일 바다를 보는 ‘바다멍’을 했다. 솔밭에 캠핑 의자를 놓고 앉아 바닷바람에 취하고 솔향기에 반한 하루였다. 35년 전 기억을 떠올리며 의자의 새로운 쓸모를 발견한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정상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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