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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소리] 세상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책들

  • 국제신문
  •  |   입력 : 2022-06-21 18:23:47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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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연극을 한 편 관람했다. 책 너머에 숨은 채 작가의 언어를 빌려 세상에 조금씩 목소리를 내는 나의 모습과 달리, 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며 생생한 표정과 몸짓으로, 복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육성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연극배우들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익숙한 텍스트의 세계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세계였다.

한 명의 소비자로서 접근했을 때 콘텐츠를 접하고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다 남은 주말을 보내고 다시 회사로 출근할 때, 나의 발걸음은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의 영역으로 향한다. 내가 단돈 얼마를 들여 잠깐 즐긴 콘텐츠를 위해, 누군가는 머리를 쥐어 싸매고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무대 뒤에서 준비한 것처럼, 나 역시 단돈 1만~2만 원이면 구매할 수 있는 한 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쥐어 싸매야 하는 입장이다.

책을 기획하는 일은 내가 흥미를 느끼는 콘텐츠와 독자들이 관심 가질 만한 콘텐츠 사이에 접점을 찾는 일이다. 개인의 관심사와 대중의 관심사를 연결하는 작업인 만큼 그 과정이 쉽지 않다. 운이 좋으면 두 관심사가 일치하며 단순한 아이디어가 출판 기획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어긋나 있는 편이다.

괜찮은 연재물을 발견하거나 좋은 논문을 쓴 연구자를 찾았을 때, 매력적인 내용임에도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외서를 발견했을 때, 머릿속으로 한 권의 책을 그려본다. 나의 기준에서는 모두 세상에 반드시 나와야만 하는 이야기다.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담론이기도 하고,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 더 밝게 바꿀 콘텐츠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달콤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책을 상상하는 건 편집자만이 누리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아이디어가 기획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여러 고민이 필요하다. 그저 재미있다고 해서, 중요한 사회 담론을 담고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책을 만들 순 없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나의 취향을 떠나 대다수 사람도 흥미를 느낄 수 있는지 철저히 따져야 한다. 중요한 사회 문제를 담은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항상 시청률이 높게 나올 수 없는 것처럼, 중요한 사회 담론을 담고 있다는 것과 팔릴 가능성이 있다는 건 엄연히 다른 문제다. 무엇보다 편집자라 해도 회사에서 일정하게 월급을 받는 직장인인 이상, 성과에 대한 고민을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손익에 관한 고민을 많이 할수록, 베테랑 편집자일 확률이 더 높을 것이다.

이렇게 온갖 고민을 하다 보면 결국 대부분의 아이디어가 머릿속에만 맴돌다 높은 장벽을 넘지 못하고 그만 사라지고 만다. 조금만 더 가다듬었으면, 확실히 팔 수 있는 포인트를 찾았으면, 회사를 설득할 수 있는 지점이 좀 더 있었다면, 그래도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든다. 그렇게 세상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책들은 나의 머릿속에서만 잠깐 머물다 금세 산산이 흩어져버린다. 수십, 수백 권의 책이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중 한두 권쯤은 내 예상과 달리 세상에 나왔다면 큰 인기를 얻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저 나의 걱정과 불안이 사라짐을 선택했을 뿐이다. 이처럼 수많은 책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서 생존과 사라짐을 끊임없이 반복한다.

내가 관람한 연극 역시 험난한 장벽을 여러 차례 넘으며 걸러지고 또 걸러진 결과 하나의 콘텐츠로 탄생했을 것이다. 불과 몇 초 만에 지나가는 대사 하나도, 미세한 몸짓 하나, 표정 하나도 모두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들이다. 세상에 어느 것 하나 그냥 만들어진 건 없으며, 무대에 놓인 소품 하나도, 문장 사이에 찍은 쉼표 하나도 모두 기획자 혹은 창작자의 치열한 고민 끝에 존재하는 것이다. 연극이나 책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소비하는 커피 한 잔에도, 옷 한 벌에도, 노래 가사 한 줄에도, 밥 한 공기에도 많은 이의 땀방울이 꾹꾹 눌러 담겨 있다. 자신의 마음을 담아 무언가를 만들어본 경험이 있다면, 이러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춤이든, 연기든, 무엇이든 좋다. 크고 작은 창작물들이 모여 상상력의 폭을 넓혀주고 더 나아가 우리를 다른 존재와 연결해줄지도 모른다.

박정오 출판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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