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이 1990년 발표한 소설 ‘얼굴’. 평범한 은행원인 주인공은 밤마다 잠을 자지 않고 똑같은 비디오테이프를 되풀이해서 본다. 주인공이 집착한 비디오는 5·18 광주민주항쟁의 처절한 모습을 우리나라 국민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어머니의 노래’와 ‘광주는 말한다’이다. 그렇게 비디오를 보는 이유는 “거기 김 형 얼굴은 안 나오던가요?”라고 물은 직장 동료 때문이다.

주인공은 광주민주항쟁 당시 7공수여단 소속 계엄군이었다. 지원 하사관이 아니라 ‘논산훈련소에 들어갔다가 줄 잘못 선 죄로 차출된 일반병’이었다. 1980년 5월 17일 광주로 가서 열흘 동안 있었다. ‘광주’를 처음부터 끝까지 겪은 것이다. 이 소설은 당시론 특이했다. 피해자인 시민이 아니라 가해자의 한 축인 공수부대원 시각에서 광주민주항쟁을 바라봤다. 하지만 작가는 죄없이 끌려간 주인공도 일종의 피해자라는 식의 주장은 하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이 비디오에서 자신의 얼굴을 끊임없이 찾는 모습을 통해 가해자인 계엄군이 느끼는 심리적인 갈등을 드러낸다.

이 소설은 단순히 한 계엄군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주인공처럼 자신의 얼굴이 나오는지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돌려본 계엄군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에서 괴로워했을 것이다.

비디오 속 얼굴을 찾던 계엄군이 42년 만에 세상으로 나왔다. 광주민주항쟁 당시 3공수여단 소속이었던 김귀삼 씨 등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가족을 잃은 ‘오월 어머니’ 10여 명을 지난달 처음으로 만났다. 김 씨 등은 오월 어머니들의 가족을 해친 직접적인 가해자는 아니다. 광주민주항쟁 첫 사망자인 고 김경철 열사의 어머니 임근단 여사는 김 씨 등을 끌어안고 “아들을 만난 것 같다”며 눈물을 흘렀다. 임 여사는 “아들을 때린 당사자를 만났어도 안아줬을 것”이라고 했다. 오월 어머니들은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를 할 사람이 없다. 많은 사람이 고백과 증언을 통해 용서와 화해로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오월 어머니들의 손을 잡은 김 씨는 “용서받을 수 있을지 숨죽이고 있는 계엄군 출신들이 많을 것”이라며 “그들에게 상황을 잘 전하고 용서와 화해를 위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더 많은 얼굴이 세상으로 나와 용서와 화해가 이어져야 한다. 그래야 광주민주항쟁의 상처가 치유될 것이다.

김희국 신문국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