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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칼럼] 전쟁 속 은폐된 범죄, 전시 성폭력 /김인선

인간의 영혼과 삶 파괴 해 입히는 최악의 방법, 묵인되고 처벌 안 받아

침묵하면 우리도 공모자

  • 김인선 문학박사
  •  |   입력 : 2022-04-20 19:54:06
  •  |   본지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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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이 전쟁 무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개되는 숫자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철수하는 러시아군이 강간을 군사 전술로 사용하면서 어머니들이 자녀들 앞에서, 딸들이 가족 앞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키이우 북쪽 이반키우에서는 15세, 16세 자매의 강간 소식이 전해지자 지역 여성들이 머리를 짧게 밀어버렸다. 러시아군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 자구책이다. 우크라이나 인권 옴부즈맨에 따르면 러시아 군인들이 부차에서 25일간 14세에서 24세 여성 25명을 지하실에 감금한 채 조직적으로 강간했다. 여성에게 침략군의 자녀를 낳도록 강제한 인종청소의 일환이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줄곧 여자는 전리품 취급을 받았다. 서양 최초의 역사서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여성을 납치한 이야기로 첫 장을 시작한다. 강간(rape)은 라틴어 rapere에서 유래하는데, 훔치다 움켜쥐다 쟁취하다란 의미다. 여성이 재산처럼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간은 마체테 칼, 자동소총이나 다름없는 전쟁 무기다. 보스니아부터 르완다 이라크 나이지리아 콜롬비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이르기까지 20세기에도 강간은 전략적 무기로 사용되었다. 여성들은 군사 목표물이며 강간은 나라와 지역 공동체를 파괴하는 대량살상 수단이나 다름없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는 전쟁 중 하루 1000명, 한 시간에 70명의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

우크라이나 부차의 사례처럼 전시 강간이 민족 정체성 약화, 장기적인 인종청소의 방편이 되는 상황은 특히 두렵다. 종군기자 크리스트나 램의 ‘관통당한 몸’에 따르면 발칸 전쟁 중 세르비아 군인들이 세운 강간 수용소에서 생존자들은 감금된 채 아기를 낳아야 했다. 보스니아 내전에서 강간의 목적은 세 가지였다. 적의 여성을 욕보이기, 보스니아계 주민에게 고향을 떠나도록 만들기, 이들에게 세르비아계 아기를 임신시켜 인구 구성을 변화시키기. 이라크에서 이슬람국가는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무슬림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을 알고 공동체 파괴의 일환으로 야지디 소수민족 여성들을 조직적으로 인신매매해 성노예로 삼았다. 20세기 이후 전시 강간은 특정 집단의 정체성을 지우고 그들을 나라에서 제거하려는 최종 해결책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과거에 비해 훨씬 더 전략적으로, 조직적으로, 무엇보다 지도부의 지휘 아래 자행되고 있다. 결코 개인의 일탈로 취급할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간은 세계에서 가장 소홀히 다뤄지는 전쟁범죄다. 전시 강간을 ‘전쟁의 흔한 부산물’로 무시하기엔 역사적으로 세계적으로 그 참상이 끔찍하고 광범위하지만, 제대로 된 처벌은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침묵만 있었다. 성노예로 고통받은 위안부 여성에 대한 침묵. 스탈린 군대에 강간당했으나 역사 교과서에는 한 줄도 언급되지 않은 수천 명 독일 여성에 대한 침묵. 전시 강간은 묵인되었고 처벌받지 않았다. 증거가 있을 때조차 전쟁에 으레 발생하는 사건일 뿐이라는 잘못된 믿음 때문에 법정에 오르지 못했다. 국제전범재판소가 전시 성폭력 혐의로 유죄판결을 내린 것은 르완다 학살범 아카예수 재판이 최초였다. 1998년에야 비로소 국제사회가 강간을 인종청소와 제노사이드 수행 무기로 인정한 것이다.

생존자들은 강간이 죽음보다 끔찍하다고 호소한다. 어린 소녀를 버림받은 사람으로 만들어, 인생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바라게 한다. 공동체에서는 ‘나쁜 피’로 거부당하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보며 그들이 겪은 고통을 매일 떠올리게 한다. 강간은 영혼과 의지, 삶 자체를 파괴하므로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최악의 방법’이다. 누군가는 ‘느린 살인’이라 불렀다.

성폭력이 군사 활동의 중요한 한 부분인 것이 확실하다면 ‘전 지구적인 문화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날 강간은 보편적으로 비난받는 범죄인데, 전시에는 왜 문제시되지 않고 하찮게 여겨지는 것일까. 전시 강간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전략으로 자행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왜 책임자 처벌은 이토록 어려울까. 보스니아 내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피와 꿀의 땅에서’를 제작한 안젤리나 졸리는 전시 강간은 ‘막을 수 있는 전쟁범죄’라 단언한다. 분쟁지역 성폭력은 전 지구의 문제다. 침묵하는 한 우리도 공모자다. 성범죄 생존자에게는 비난이나 소외가 아닌 공동체의 공감과 지지가 필요하다. 전시 강간의 증인도 당당하게 증인석에 설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전쟁의 역사가 다시 쓰여야 한다. 수천 년 동안 강간이 전쟁 무기로 사용되어왔지만 거의 모든 역사책에서 강간 기록을 찾아보기 힘들다. 고통 공포 피해 희생에 대한 망각과 무시가 아니라 이들의 경험을 소중하게 기억해야 한다. 더 나은 역사는 여기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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