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다림 끝에 인쇄소로부터 ‘청춘의 함성, 시민의 합창-키워드로 읽는 부마민주항쟁’ 책더미를 받았다. 박스를 대충 정리하고 한 권을 꺼내 든다. 떨림이 느껴진다. 독자로서 서점에 주문한 책을 받아들 때의 느낌이 가벼운 설렘이라면, 출판인으로서 제작한 책을 받아드는 느낌은 세포를 수축시키는 무거운 떨림이다. 혹시 하자는 없는가.

이번엔 여느 때보다 더했다. ‘키워드로 읽는 부마항쟁’이라는 잠정 제목의 원고를 받아들 때부터 그랬다. 우선 출판 의뢰인이 친정인 국제신문사의 후배들이라는 점이다. 국제신문은 2020년 ‘다시 쓰는 부마민주항쟁 보고서’ 1·2로 한국신문상과 한국기자상을 받았다. 저자들은 그 탐사보도의 주역들이다. 책을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국제신문과 후배들에게 큰 누를 끼치는 꼴이 될 터였다.

부마민주항쟁이란 주제도 작용했다. 이것은 서슬 퍼런 유신독재 시기에 일어난 최초·최대의 시민항쟁으로 대한민국 민주화 여정의 첫 디딤돌이다. 송기인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이사장은 발간 축사에서 “박정희 18년 독재를 종식시킨 것은 한 발의 총알이 아니라 부산과 마산의 시민이 외친 ‘독재타도! 유신철폐!’의 함성이었다”고 했다. 부마민주항쟁은 부산과 마산(현 창원) 시민의 자랑스러운 유산이다.

이 같은 역사적 의미에도 불구, 부마민주항쟁은 부산시민, 특히 젊은 세대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를 아쉽게 여긴 저자들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지역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그 정신을 미래세대가 계승 발전시켰으면 하는 바람이리라.

책은 103개의 키워드로 부마민주항쟁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단순히 사전적 나열이 아니라 항쟁의 배경과 경과 그리고 사후 의미 찾기 등 3부로 나눠 항쟁을 재구성했다. 다양한 자료 외에 현직 기자들의 탐사취재가 곁들여져 현장감과 사실성이 높고, 키워드마다 이를 상징하는 그림이 더해져 부마민주항쟁을 잘 모르는 청소년에게 쉽게 다가갈 것으로 기대된다.

출판인으로서, 첫 독자로서 소감을 시민과 공유하고자 이 글을 쓴다. 책을 읽으며 새삼 독재정권의 폭압성에 전율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항쟁 발발 이틀 만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 특전사를 투입했다. 외침으로부터 국가를 지켜야 할 특전사는 독재권력의 방패막이로서 시위대를 무차별 폭행하고, 심지어 무고한 시민을 잡아가 고문했다. 이들은 공권력인 경찰도 맘대로 두들겨 팼다. 심지어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은 대책회의에서 “캄보디아에서는 국민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다. 우리도 시위하는 사람 200만 명 죽인다고 무슨 일 있겠습니까’라고 했다니 아연할 따름이다.

절로 마음속의 박수가 나오는 대목도 있다. 청춘들의 결기다. 부산공전 부산대 부산여대(현 신라대) 동아대 경남대, 심지어 경남고 삼성여고 동아고 대동고 등 고등학교 학생들이 독재정권의 폭압에 들고 일어났다. 이들 청춘의 거대한 함성이 항쟁의 불을 댕겼다.

청춘의 함성에 시민이 화답해 거대한 시민의 합창을 이루어냈다. 시민은 학생 시위대를 쫓는 경찰에 벌건 연탄을 던져 저지하는가 하면 시위대에게는 물과 과일을 건네주며 응원했다. 그리곤 퇴근 시각 무렵 곧바로 대학생들과 합세해 거대한 시위대를 형성했다. 계엄군에 쫓기는 사람을 제사 모시러 온 오빠라며 숨겨준 ‘소복 여인’처럼 시민 모두가 의협심을 발휘한 항쟁의 주역이었다.

시민이 폭력 진압에 대항하면서도 이성과 절제심을 잃지 않았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시위대는 공권력의 상징인 파출소와 가혹한 수탈기관으로 인식된 세무서를 공격했다. 특히 권력 감시는 외면하고 독재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하는 언론사를 습격해 유리창을 깨부수는 등 응징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독재정권에 비판적이었던 CBS는 공격하지 않고 취재를 도와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만큼 시위대가 이성적이었다는 방증이다.

저자 최현진 기자의 말대로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 부마민주항쟁이 없었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아직 요원할지도 모른다. 부산 마산이 민주화의 성지라는 것은 결코 과언이 아니다. 부마민주항쟁은 부산의 자랑스러운 유산임에 틀림없다. 이 유산을 잘 지키고 그 의미를 계승 발전시키는 것은 그날 함성을 지른 청춘에서 어느덧 기성세대가 된 우리들의 몫이다.

오늘 우리가 새겨야 할 부마민주항쟁 의미의 핵심은 ‘우리 민주주의는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폭압적인 독재정권에 청춘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어섰기에 민주주의를 쟁취할 수 있었다. 나아가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지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면 권력에 의해 뺏길 수 있다는 점도 명심해야 한다. 바야흐로 대선 국면이다.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을 잇고 발전시킬 후보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