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윤석열 후보가 페이스북에 쓴 ‘여성가족부 폐지’를 보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젠더 갈등을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만은 아니다. 지난해 10월 자신이 발표한 ‘양성평등가족부로 개편한다’는 공약을 너무나 쉽게 뒤집어서다. 정치철학은 매니페스토를 통해 구체화되는데 석 달도 안 돼 정부 개편안을 폐기한 데 실망이 컸다. 윤 후보는 8일 ‘남녀 갈라치기 아닌가’라는 취재진 질문에 “국가와 사회를 위해 하는 일”이라고 두루뭉술 해명했다. “신지예 전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를 영입하더니 이제는 반대로 가느냐”는 비판에는 어떤 변명을 내놓을까.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도 스텝이 자주 꼬인다. 부동산 감세 정책이 대표적. 이 후보가 부동산 민심을 달래려 ‘거래세·보유세 동시 완화’ 카드를 꺼내자 청와대는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때 이 후보의 ‘부동산 불로소득 타파’ 주장에 동의했던 지지자들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소수의 다주택자 표를 얻기 위해 문재인 정부와 차별화하려고 하느냐”는 지적이 진보진영에서 더 많다. 지난 5일 진보성향 모임인 ‘지식인선언네트워크’가 연 토론회에선 “이 후보가 자산불균형 완화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국민은 말을 자주 고치는 정치인을 의심한다. 집권했을 때의 정부상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로 문재인 정부는 너무나 예측 가능했다. 문 대통령이 쓴 ’문재인의 운명’이나 ‘운명에서 희망으로’ ‘대한민국이 묻는다’만 봐도 국정운영 방향이 훤히 드러났다. 여의도 정가에서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자주 나온 이유다. “이럴 줄 알았다”는 비꼬는 의미도 내포돼 있지만 한편으로는 예측가능한 정책을 펴고 있다는 칭찬으로도 읽힌다.

후보들이 말을 바꾸는 이유 중 하나는 빈약한 철학 때문 아닐까. 리더다운 비전과 원칙을 내세워 내 편을 만들어야 하는데 눈앞의 표에 휩쓸리니 포퓰리즘만 난무한다. 아니면 유력 후보의 실력이 뒤늦게라도 실체를 드러내 국민이 평가하게 된 것을 ‘국운’이라고 위안해야 할까.

송치영 백년가게국민운동본부 위원장은 신간 ‘백년가업’(작품미디어)에서 장수기업의 생존 비결을 ‘가치’라고 했다. “백년가게의 공통점은 남다른 선택이다. 남과 경쟁하지 않는다. 업의 본질에 충실할 뿐이다. ‘어떠한 가치 있는 일을 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익을 좇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먼저 얻으려 한다.” 가치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유권자와 소비자는 다르지 않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애용했다는 독일 연필 제조사 파버카스텔의 경영 목표는 ‘미래세대의 비용을 사용해 현재의 이익을 창출하지 않는다’이다. 나랏돈을 쌈짓돈처럼 생각하는 대권후보들이 배워야 할 가치다. 부산 백년가게 1호점인 협신전자(1973년 개업)는 2대 가업 승계에 이르기까지 특허 1건과 실용신안 3건을 등록할 만큼 ‘혁신’했다. 1999년부터 운영 중인 전자부품 온라인 쇼핑몰은 평일 유입 고객이 2만5000여 명에 이른다.

울산의 김영숙 헤어스쿨은 미용업 최초의 백년가게다. 이곳 주인은 틈틈이 수집한 500여 종의 골동품을 전시해 손님들의 지루함을 달랜다. 60년 역사의 대동할매국수(경남 김해)는 예나 지금이나 멸치 곰국의 육수 맛에 변함이 없다. 1976년 개업한 경남 진해 미진과자점은 매년 4월 채취한 벚꽃꿀로 만든 빵과 어려운 시절을 견딘 삼형제의 ‘버티는 힘’이 장수 원동력. 1979년 개업한 울산의 남문소리사(1979년 개업)는 30년 전에 구매한 제품도 수리해주는 서비스 정신이 장수의 숨은 비결이다. SNS 홍보는 물론 복합문화공간을 만들어 고객에게 다가가는 변화가 ‘경험의 가치’에 영속성을 부여했다. ‘나’와 경쟁하면서 평생 업의 가치에 충실한 강한 ‘그립’이 백년가게의 공통된 비결이다.

날이 밝으면 대권 후보들은 또 전통시장을 찾아가 손을 내밀 것이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다”고 했다가 내일은 “이대남(20대 남자) 또는 이대녀(20대 여자)가 싫어하니 철회한다”고 할 것이다. 상대를 향해서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할 것” “아침에 한 말이 저녁에 달라지는 식“이라고 공격할 것이다. 전두환을 옹호했다가 사과하는 식의 행보도 반복될 것이다. 참모로부터 “연기만 해달라”거나 “나라를 어떻게 해야 되겠다는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모욕을 당할 것이다. 자신의 말 바꾸기는 잘못을 즉각 바로잡는 ‘군자표변’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래서는 정치 혐오만 깊어진다. 대권후보들은 당장 백년가게를 찾아가 그들이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은 가치를 배우길 권한다. 자신을 바꿔내는 것이야말로 진짜 군자표변이다.

디지털부문장 nsl@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