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건 빛나는 역사도 있고 고난의 역사도 있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빛나는 역사에서 희망을 보고 고난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빛나는 역사만 강조하고 부풀리면 극단적인 자기도취에 빠지게 된다. 고난의 역사만 강조하면 자신을 비하하여 자포자기하는 노예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나라는 광복 이후 최빈국에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대통령 선거와 같은 중요한 정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정략적으로 나라를 비하하는 발언이 쏟아지는 현실이 서글프다.
우리 역사에서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지독한 사대모화에서 자기 비하가 시작되었다. 근현대사에서 자기 비하 연원은 대일항쟁기 일제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요사’가 극명하게 보여준다. “먼저 조선인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여 조선 민족의 혼과 문화를 상실하게 하라.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능과 악행을 들추어서 과장하여 가르쳐 조선 청소년들이 부모와 조상들을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기풍이 되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조선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갖게 하고,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하라. 그럴 때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무서운 일제의 흉계다.
불행하게도 일제 35년 동안 조선 청소년들은 이 관점에서 교육받았다. 조선은 미개해 스스로 역사를 발전시킬 능력이 없어서 고대에도 중국과 일본 식민지 시기에 비로소 역사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조선 민족은 열등해서 당파 싸움에 몰두하다 나라가 망했다. 조선인은 미개하고 양아치 근성이 있어서 북어처럼 두들겨 패야 맛이 난다.
이 주제들이 일제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입한 중점적인 교육 내용이었다. 물론 우리가 고대에 중국과 일본 식민지였다는 사실은 일제가 쓴 소설이다. 인류 역사에서 권력을 두고 내부에서 싸우지 않은 나라는 없다. 우리 민족의 상생 정신에 비추어 양아치 근성도 날조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수한 일본인이 조선인을 지배하는 것은 조선인에게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조선인이 자신을 비하해서 노예의 삶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시도였다.
안타깝게도 이런 교육의 잔재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넓고도 깊게 남아 있다. 특히 지식인들 사이에 그러하다. 몇 가지 사례만 보자. 대일항쟁기가 차마 좋았다고는 못하고 살만했다고 주장하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이 버젓이 학자로 행세하는 세상이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는 대놓고 말할 수 없으니 우리 땅이 아닐 수도 있다고 글을 쓰는 사람이 국가 기관에서 녹을 먹고, 국고로 제작한 동북아역사지도에서 독도를 빼버려도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나라다. 가야사 복원에 1조 원 넘는 혈세를 투입하는데 가야가 일본 식민지 임나라고 기를 쓰고 우기는 학자들에게 대한민국 정부가 부화뇌동하는 현실이다. 일본군 집단성폭행 피해자 할머니들이 가해자인 일본군과 동지였다고 주장해서 피소된 모 대학 교수를 대한민국 지식인 200여 명이 지지 성명을 발표해도 별로 비판하는 언론이 없는 나라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여러 사안에서 가해자인 일본 편을 드는 것은 그리 드문 예가 아니다.
문제는 유력 정치인까지 자기 비하적으로 역사를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정치인은 오늘날 한·일 관계 악화가 우리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정치인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언급하자 역사관이 의심된다고 비난했다. 이 밀약은 1905년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먹는데 서로 양해한 협약이다. 우리 동맹국 미국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발언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 정치인은 현 정부에서 추진 중인 종전선언에 대해서도 우리 안보를 저해한다고 반대했다. 6.25 당사국도 아닌 일본을 거든 것이다. 전쟁 상태를 지속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누구도 우리 자존심을 지켜주지 않는다. 우리 위상에 맞는 당당함이 우리 미래를 담보하는 전제 조건이다. 일제가 항복한 직후 1945년 9월 12일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다음과 같이 저주했다. “일본은 졌다. 그러나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이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사관을 심어 놓았다. 결국 조선인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중략) 현재의 조선은 결국 일본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했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 잊어서는 안 될 말이다. 일본 정치의 한국 인식도 본질적으로 변한 게 없다.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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