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초량 아카이브-탈(脫)-락(樂)한 아카이브’ 행사를 위해 참가자들과 초량의 산복도로 주변을 걸었다. 산허리를 구불구불 지나는 산복도로는 부산진구 동구 중구 서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고목의 기둥 같은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골목길과 계단길이 잔가지처럼 펼쳐있을 것이다. 잔가지의 끝에 매달린 잎은 누군가의 집. 내가 사는 집도 산복도로의 잔가지 끝에 걸려있다. 동네를 산책하면 길 끝에 열린 문으로 살림이 훤히 보인다. 그 문을 향해 음식을 들이밀며 불쑥 말을 거는 이웃,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대답부터 하는 안쪽 사람이 있다. 집 안팎의 경계가 모호하다. 계단참이나 길 한편 바닥에 아무렇게나 모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도 자주 만난다. 빨래 건조대와 고추 말리는 돗자리가 가던 발걸음을 주춤하게 만든다. 길과 계단이 공동마당이 되는 산복도로의 마을들은 차도와 인도의 구분마저 뚜렷하지 않다.

대학 시절에도 이런 길로 다닌 적 있다. 인문대 옆 산비탈에 같은 과 선배의 자취방이 있었다. 나와 친한 동기들은 그 집에 곧잘 놀러 가곤 했다. 그 동네의 집은 형태가 다양했지만 대개 작았다. 땅 면적이 넓은 집이다 싶으면 좁은 마당을 두고 쪽방 여러 개가 모인 형태였다. 강의가 비면 선배를 졸라, 걸어서 오 분 거리의 방에 갔다. 우리는 갹출한 돈으로 식재료를 사서 밥해 먹고 누군가 빌려온 신작 비디오를 봤다. 양파 하나로도 매콤달콤한 반찬을 만들 줄 아는 선배는 우리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두부 반 모와 돼지고기 3000원어치만 사오라’고. 그러면 우리는 사와야 할 부식의 규모에 압도(?)당해 서로 가기 싫어했다. “선배, 그냥 두부 한 모랑 고기 한 근은 안 돼요?” 호기롭게 질문하면 선배는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안 돼!” 골목 끝 부식가게 할머니는 가난한 동네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부식도 후하게 떼어 팔았고 외상도 받았다.

다 놀고 학교로 돌아가는데 선배는 매번 남의 집 마당을 가로질렀다.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잠긴 적 없는 모르는 사람 집 대문으로 들어가면 담벼락도 없이 학교와 바로 연결되는 계단이 나왔다. 집의 경계가 왜 이러냐며, 집주인이 소유한 땅이 어디서 어디까진지 애매하다며, 우리는 조잘거렸다. 그러면서도 마당을 가로지르는 순간에는 주눅 든 채 조용히 걸었다. 오직 선배만이 당당했다. 그런 것쯤 당연한, 음식을 나누던 이웃이니까.

‘망양로 산복도로 전시관’과 ‘초량 당산’을 지나 ‘168 이바구계단’에 갔다. 168개의 계단 시작점에서 마라톤 행사를 하고 있었다. 어린 남자아이가 아빠와 함께 마라톤에 도전했다. 계단은 걷기만 해도 숨이 찬다. 그런 곳을 무모하게 뛰겠다니, 추억은 힘이 센가 보다.

산복도로가 없던 시절, 초량 윗동네로 가려면 이 계단을 올라야 했다. 계단 위쪽에 집을 지으려면 건축자재는 계단을 통해 운반한다. 언젠가 취재차 그곳에서 만난 어르신이 “산복도로 생기기 전에는 요 우(위)에 공사할 적에, 아지매들이 흙이고 뭐고 ‘다라이’에 채워서 머리에 이고, 이 계단을 수십 번씩 오르락내리락 했어예. 대단하지예?” 삶터와 일터가 섞인 동네 이야기. 이 ‘이바구(이야기)’는 누구에게 어떤 추억이 될지 잘 모르겠다.

산복도로를 건너 비탈진 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다시 보니 잔가지라고 표현한 골목과 계단이 산복도로보다 먼저 있었다. 기둥보다 가지가 먼저인 나무가 어딨나. 문장을 고친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거대한 나무의 기둥 같은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골목길과 계단이 잔뿌리처럼 펼쳐질 것이다.’ 잔뿌리 끝에 매달린 집은 흙. 영양분. 경계가 지워지는 모든 자리마다 우리를 살리는 곳이다.

길치인 나는 동네를 산책하다 길을 잃어도 놀라지 않는다. 길이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결국 길은 다 연결되어 있고 시간 들여 걷다 보면 누군가의 집이, 누군가의 마당이, 누군가의 골목이, 누군가의 출구가 어디선가 반짝, 나타나기 때문이다. 지난해를 떠올리면 오래도록 헤맨 기분이다. 새해, 우리 모두의 앞에 잠깐이라도 반짝, 바라던 출구가 나타나길 소망한다.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