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통계청 기준 대한민국의 임금노동자 2099만2000명 중 비정규직 노동자는 806만6000명으로 비정규직 비율이 38.4%에 달한다. 물론 이것은 통계청의 기준일 뿐 통계에 잡히지 않는 노동자까지 합한다면 그 비율은 훨씬 높아질 것이다. 여기에 자영업자 657만4000명까지 더하면 대한민국은 보장되지 않는 경제적 수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정규직 임금노동자보다 더 많아진다. 결국 대한민국은 비정규의 사람들이 정규직을 떠받치는 형태의 고용구조, 그러니까 비정상이 정상을 떠받치는 구조의 사회다.

IMF 체제를 거치면서 노동유연화 정책이 시행된 이후 계속 비정규직 고용은 늘어났고, 앞으로도 이런 흐름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다. 어떤 자본가도 고정비용을 지출하는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면서 이윤을 창출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등을 부추겨 말 잘 듣는 정규직을 우군으로 만들려고 들 것이다. 비정규직에 놓일 가능성의 사람에겐 불안과 공포를 조장하는 이런 명령들이 떨어질 것이다. “그러니까 말을 잘 들어. 그러니까 더 열심히 스펙을 쌓아. 그러니까 더 좋은 대학엘 들어가. 그러니까 자기계발에 더 투자하도록 해.”

정규직을 추구하는 일은 이제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모두가 믿는 종교처럼 돼 버렸다. 이 지상과제를 거부하는 일은 바보 같은 일이거나 자신의 능력 없음을 변호하는 변명에 지나지 않게 됐다.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라는 슬로건은 한국노총에서든 민주노총에서든 어떤 이견도 용납하지 않는 절대과제가 돼 버렸다.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라는 과제는 이제 모든 노동자 조직, 진보적 시민단체가 끝없이 반복 암기하는 레퍼토리가 돼 버렸다.

그런데도 비정규직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제도 정치권에서도 문제를 삼는 이 과제는 전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을 그렇게 지속해서 꿈꾸고 외치는데도 정규직의 완강한 벽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너무 빤한 결론이지 않은가. 정규 대 비정규의 구도를 강화해 가는 이 자본주의 체제를 허물어뜨리지 않는 이상 비정규의 삶을 정규의 삶으로 전환하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정규 대 비정규의 프레임’ 자체를 의심해야 하지 않을까? 이 프레임에 갇혀 끝없이 경쟁하며 정규의 삶을 꿈꾸기보다 비정규의 삶 자체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있는 세상’을 꿈꾼다. 정규직으로 굴종하며 자본의 노예가 되어 사는 세상이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 사는 세상을 꿈꾼다.

정규직으로 월급을 받아서, 밥도 되지 않는 통신비를 자본에 갖다 바치고, 공교육도 모자라 엄청난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빚을 내고 집을 사서 평생 대출금을 갚고, 아파도 병원비가 없어서 벌벌 떨어야 하는 세상, 주체적 삶의 시간을 오로지 자본에 저당 잡고 사는 삶이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살며, 최소한의 통신비를 지출하고, 교육은 권리라 교육비가 들지 않고, 주택이 제공돼 대출이자를 갚지 않아도 되고, 아프면 언제라도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세상, 남는 시간에 친구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춤추며 즐기는 세상을 꿈꾼다.

정규가 되기 위해 그들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시험을 치고 낙타구멍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 정규직으로 살며 자본가에게 해고하지 말아달라고 구걸하는 세상이 아니라, 정규직으로 살며 비정규직을 견제하고 배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살며 자본가에게 ‘까불면 당장 그만두겠다’고 호통을 칠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자본이 만들어 놓은 ‘정규직(자본) 대 비정규직의 프레임’을 깨고, 무정형의 비정규직이 정규직에게 손을 내미는, 고생이 많다며 격려하는 세상을 꿈꾼다. 자본에 복속된 ‘정규’가 아니라 삶에 복속된 ‘비정규’를 꿈꾼다.

그리고 그것은 환상이 아니라 작금의 생산력으로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먼저 타협하고 포기한 채 그것을 주장하지 않고, 기획하지 않고, 실행하지 않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