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은 삶의 서러움을 이해하는 것이다. 서러움 없는 일생은 없다. 돈이 없어 서럽고, 힘이 없어 서럽고, 건강하지 못해 서럽다. 외로워 섧고, 오해와 비난을 받아 섧고, 무시당해 섧고, 하소연할 곳이 없어 섧다. 막막해서 서럽고, 추억 때문에도 서럽다.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는 욕망 때문에 섧기도 하다. 자기 삶도 그렇고 타인의 삶도 그렇다. 연민은 삶의 설움을 아는 것이다.

올해 잘한 일을 생각해 보았다. 잡히는 것이 없었다. 잘한 일을 생각했는데 떠오른 것은 잘못한 일들이었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코끼리를 생각하게 되는 그런 인지 습관인지도 모른다.(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아무튼, 상황을 장악하지 못한 일과 성급한 결정, 때를 놓친 일, 감정을 쉬이 일으킨 일, 말을 삼키지 못한 일 등 서툴고 허접하고 실수한 일들은 어찌 그리도 잘 떠오르는지. 한심하다. 그러나 우리네 삶이 자기원망과 자기합리화 사이 그 어디쯤 있는 것이다 보니 자기원망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자기합리화 즉 잘한 일을 마침내 생각해냈다. 고작 두 개인데,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연민’과 ‘기대의 분산’이 그것이다. 연민은 ‘토지’로부터 유래했다. 분량의 무게에 주눅이 들어 ‘토지’ 읽기를 몇 십 년째 미루어왔다. 꽃 밝은 4월 어느 날, 사행일치(思行一致, 생각난 것을 그때 바로 실행하는 것)를 했다. 첫 문장인 ‘1897년의 한가위. 까치들이 울타리 안 감나무에 와서 아침 인사를 하기도 전에, 무색옷에 댕기꼬리를 늘인 아이들은 송편을 입에 물고 마을 길을 쏘다니며 기뻐서 날뛴다’부터 마지막 문장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 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까지 두 달 가까이 걸렸다. 감동보다는 후련함이 앞섰다. 토지를 다 읽었다는 사실 자체에서 홀가분함을 느꼈다. 해야 할 일을 한 후의 그 홀가분.

언제나 그렇듯, 감동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왔다. 줄 친 부분을 타이핑하면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토지’는 홀가분에서 감동으로 반전되었다. 그 반전은 서러움이라는 단어가 유독 자주 등장한다는 데서 출발했다.

‘황무지같이 끝없이 밤낮없이 널려 있는 사람들의 서러움’, ‘제 설움에 울고 인간사가 서러워 울고 창자를 끊는 것같이 가락과 구절이 굽이쳐 넘어가고 바람에 날리어 흩어지는 상두가에 눈물을 흘린다’, ‘목이 메어 강가에서 울 적에 별도 크고오 물살 소리도 크고 아하아 내가 살아 있었고나 목이 메이면 메일수록 뼈다귀에 사무치는 설움, 그런 것이 있인께 사는 것이 소중허게 생각되더라 그 말 아니더라고?’, ‘……설움을 모른다면 어찌 마음이 있다 할 것인가’.

서러움은 삶의 보편적인 감정이기에 가장 많이 쓰였을 것이다. 박경리 선생의 삶을 관통하는 정서가 궁금해졌다. 연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의 설움을 알고 이해하는 것. 연민은 자신을 한 발 물러 세우는 것이고, 조금 위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이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다. 그래서 연민은 자기를 다독이고, 상대를 악마화하지 않는다. 덜 분노하고 원망한다. 연민은 기대의 분산으로 이어졌다.

기대의 분산은 우리 시대의 노마디즘이다. 노마디즘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기대의 개념으로 해석이 확장되어야 한다. 기대를 한 곳에 집중하면 세상과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 그리고 원망을 감당하기 어렵다. 기대의 분산은 자신의 잘못은 상황 탓으로, 남의 잘못은 기질 탓으로 돌리는 감정의 흐름을 제지한다. 기대의 분산은 어깨에 힘을 빼고 폼 잡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사는 삶의 형태다. 이루어진 일은 운으로 돌리는 것이며,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은 툭툭 털어내는 것이다. 기대의 분산은 편견 없는 유연한 대처다. 삶을 원활하게 하고,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며, 말을 삼킬 수 있게 한다. 기대의 분산은 조금 깊어지는 것이고, 조금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연민의 감정을 마음에 붙이고, 기대를 분산하는 것이 어쩌면 잘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서출판 함향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