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말 중남미 각국은 우파 또는 극우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민주화 과정에서 대안으로 좌파 정부를 선택했다. 도미니카공화국 베네수엘라 등에서 시작된 이러한 좌향좌 움직임은 중남미 전체로 확산돼 2011년께 절정을 이뤘다. 당시 멕시코 콜롬비아 칠레 정도를 제외하고 중남미 국가 대부분은 좌파 정부가 장악했다. 이를 분홍색 물결 즉, ‘핑크타이드(Pink tide)’라고 부른다. 극좌인 소련식 공산주의가 아닌 온건한 사회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빨강’이 아닌 ‘분홍’이 상징색이 됐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부터 중남미에서는 우파로 정권교체가 이뤄지면서 ‘블루타이드(우파의 상징색인 파란색 물결)’가 일었다. 2018년을 기준으로 베네수엘라 에콰도르 볼리비아 등을 제외하고 중남미는 다시 파랗게 물들었다. 막대한 복지 소비, 후퇴한 경제 인프라 확충 등에 따른 경제 파열음이 원인이었다. 중남미 대중은 좌파 정부에 일종의 경고를 날린 셈이었다. 이는 ‘중남미 좌파의 대몰락’으로 회자되기도 했다.

이랬던 중남미에서 다시 핑크타이드 움직임이 감지된다. 19일(현지시간) 칠레 대선 결선에서 35세의 젊은 좌파 후보 가브리엘 보리치가 극우 상대를 꺾고 당선됐다. 미첼 바첼레트 전 중도좌파 정권 이후 4년 만에 다시 칠레에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것으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부정권(1973~1990) 이후 중도 세력이 주로 집권했던 칠레에 ‘훨씬 더 왼쪽으로의’ 사회적 대변화가 예고된다.

앞선 2018년 멕시코에선 89년 만에 첫 좌파 정권인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이 들어섰고, 2019년 아르헨티나에서도 알베르토 페르난데스가 대통령이 돼 4년 만에 다시 좌파 ‘페론주의’ 정권이 돌아왔다. 올해 페루에선 좌파 초등교사 출신의 페드로 카스티요가 우파 후보를 꺾고 승리했고, 지난달 온두라스 대선에서도 좌파 후보 시오마라 카스트로가 당선돼 12년 만에 정권교체를 앞뒀다. 우파 정권인 콜롬비아와 브라질도 내년 대선에서 정권 교체 가능성이 있다. 특히 콜롬비아는 그간 한 번도 좌파 대통령이 당선된 적이 없어 이번 대선 결과가 더 주목받는다.

제2의 핑크타이드는 좌우 이념보다 집권 정부의 실정,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 양극화 등 현 상황에 대한 국민적 실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는 설명이 설득력을 얻는다. 새 ‘남미 좌파 블록’은 온건 사회주의로 막강한 연대체를 형성했던 1차 때와는 또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이선정 신문국 에디터 sjle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