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항공 같은 특수 분야에서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고철만 찾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핵실험 이후 지구 대기의 조성이 미세하게 달라졌고, 이로 인해 방사능 물질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강재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별스럽다 하겠지만 현재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생각하면 진지하게 생각할 거리가 적지 않다. 우리의 삶은 흔적을 남기고 켜켜이 쌓여 지층을 만든다. 까마득한 미래의 일일 테지만,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들춰보며 선인의 삶이 어떠했는지 추측할 것이다. 지금의 삶이 훗날 흔적으로 남을 것이라 생각하면 책임감 같은 부담감도 느껴진다.
인류세(人類世)라는 시대를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지질학적 시대구분으로 따지면 1만 년 이래 우리는 신생대 홀로세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인간의 삶은 그전과는 확연히 다른 흔적을 남겼기에 지금을 새로운 지질시대로 보기에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후대에 발굴될 지층의 흔적으로 화석연료나 플라스틱 같은 인간 문명의 부산물을 예견하기도 한다. 한 해 수백억 마리씩 먹어 치운 닭의 뼈가 유력한 증거가 될 것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산업화 이후 우리 삶은 과거 어떤 종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 지구적인 지배력을 보여왔는지라, 닭뼈든 플라스틱이든 그 흔적은 남아서 우리 삶을 증명하는 화석이 될 것이 분명하다.
후대에 남겨질 흔적 중 일부는 코로나 사태와도 깊이 관련될 것 같다. 지구의 연대에서는 찰나와 다름없는 2년간의 지층에서는 마스크와 배달포장 용기가 큰 비중을 차지할 듯하다. 혹은 인류의 유해에서 이전 시기에 볼 수 없던 특정한 바이러스와 백신의 흔적이 발견될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놀랍도록 발전한다면 코로나로 위축된 우리의 마음도 다시 읽어낼 수 있지도 않을까. 혼자 공부하고 혼자 밥을 먹고 집에서 혼자 일하는 ‘혼자’의 흔적도 어떤 형태로든 과거의 기록으로 발견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일상이 과거와 분리되고 갱신된 결과이니 말이다.
지난 두 해는 특별했다. 과거와 다른 삶의 방식을 당연하게, 혹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고군분투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 결과가 지금 우리 몸에 배어 있을 터이니 흔적도 남을 것이다. 수만 년 후의 지질학자가 아니라 몇 세대 후의 역사학자는 이 시기를 어떻게 규정할까. 지금의 무엇이 흔적으로 남아서 후대의 삶에 영향을 미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올 한 해를 마무리하자니 서글프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그것은 훗날이 아니라 지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먼 훗날의 일을 왜 걱정하나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후대에 어떻게 보일지 걱정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인 오규원은 교통사고를 겪고 난 뒤부터는 차를 타면 속옷부터 걱정한다고 고백했다. “산 자도 아닌 죽은 자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한지 아닌지에”(‘죽고 난 뒤의 팬티’) 신경이 쓰이더란다.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도 속옷이 어떻게 보일까를 걱정하는 마음이란 현재 삶의 충실성을 뜻한다. 내가 사라진 뒤라도 자기 삶의 결과에 책임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의 윤리이다. 그리고 기왕이면 후대에게 선한 것으로 남겨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보편적인 심성이다.
코로나 사태는 곧 끝날 것이다. 그러나 그 곤란은 무척 크고 본질적이라 개인적으로는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졌다. 코로나의 선물이라면 선물일 테다. 눈앞의 문제를 넘어서 조금 더 먼 미래를 사유하면 어떨까. 어찌 됐든 지금 우리의 삶은 남겨질 것이고, 후대 사람은 그 영향 아래에 살아가야 한다. 백신이 DNA를 조작해 인류를 조종한다는 만화 같은 음모론이 사실이라면 미래는 아무 걱정 없는 세상이겠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고민할 것은 백신 자체가 아니라 백신을 맞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삶의 방식이다. 지금 어떻게 살아야 다음 세대는 바이러스의 억압과 백신의 불안에서 자유로울까. 코로나 사태의 출발점에 선 우리의 대답에 따라 훗날 지구의 풍경은 바뀔 것이다. 그 대답을 위해서 사유의 깊이도 필요하지만, 몇백 년 너머를 생각하는 상상력도 필요하다. 코로나로 인한 고립은 사유와 상상을 위한 시간이며, 그 결과가 코로나의 진정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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