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익숙한 풍경. 11월이면 도로 곳곳에서 새로운 공사가 시작된다. 시민이 걷다가 다치지 않도록 균열이 간 보도블록을 꺼내고, 드러난 곳을 깎느라 아침부터 분주한 작업 현장들이다. 보통 연말이라면 한해의 과업을 마무리하고, 얻는 것은 무엇인지 또 잃은 것은 무엇인지 천천히 되짚어보기 마련이지만, 콘크리트 도로만큼은 봄의 생명력을 뽐내듯 곳곳이 요동치고 새롭게 피어난다.

나는 겨울만 되면 이어지는 전면적인 공사가 썩 달갑지 않은데 매일 아침 출근하고 퇴근하는 우리들의 평범한 하루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행정의 태도 때문이다. 만약 도로 공사가 필요하다면 조금씩 점진적으로 계획을 사전에 고지하고 천천히 이뤄지면 좋으련만, 일시에 모든 도로를 뒤엎는 바람에 시민은 매일 걷던 방향을 잃고 빙 둘러 가야만 했다. 실제 거리를 거니는 사람의 의견을 묻지 않고 무턱대고 보도블록부터 깨고 부수는 생경한 풍경. 나는 이 투박한 소통 방법이 달갑지가 않다.

새로운 시작과 함께 깨고 부수는 건 어느 도로만이 아니다. 공공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시작의 시기가 다가오면 실제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의 의견은 묻지 않고 무턱대고 부수거나 균열부터 만든다. 지난 10월 19일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 노동조합 구성원들은 기자회견을 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서울청년활동지원센터 직장 내 괴롭힘 해결 촉구 회견’이었다. 청년활동지원센터는 지난 7월 새로운 수탁 법인과 계약을 맺으며 기존 직원 27명에 대한 고용승계가 이루어졌지만, 부당징계, 무리한 인사발령, 폭언과 욕설로 오늘까지 12명이 집단 퇴사했다.

포괄적 고용 승계를 약속했지만, 그 조건 안에 업무승계는 포괄되지 않았다. 많은 청년이 자신이 이어온 업무에서 배제당하고 전문성과 과업 흐름을 무시하는 이동 절차를 겪으며 자발적으로 퇴사를 고려하도록 유도 받았다. 길어지는 취업 준비 기간에 위축되고 사회적 관계망이 단절되며 고립감을 느끼는 청년을 위해 새로운 진로 탐색 기회, 자기 이해 프로그램, 마음 건강 지원사업으로 활력을 불어넣던 청년들이 이제 직장 내 괴롭힘과 날 선 언어, 느슨하고 직무와 연관 없는 일을 연속적으로 받으며 역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청년의 활력을 위해 고민해야 하는 이들이 이젠 자신의 활력 상실을 고민한다. 전국의 청년 활동가들은 지금의 상황이 부당하다고 말한다. 이 부당함은 단순히 다른 업무를 받아서가 아니라,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일방적으로 업무에서 배제되는 ‘과정에 대한 부당함’이다. 오래 집중해왔던 동료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시간도 없이, 열의로 이어온 활동의 쉼표를 스스로 ‘정리할 시간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대한 부당함이기도 하다.

마치 무언가를 치워내듯 서둘러 이루어지는 절차.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던 성경의 어떤 구절처럼 새로운 일은 새로운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고 믿는 이들이 일으키는 변화를 우리는 흔히 ‘물갈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이런 변화가 선거를 통한 당연한 조정이자 이로 인해 더 건강한 견제가 이뤄질 것이라 하지만, 내가 보기엔 빈약한 믿음일 뿐이다. 앞선 경험이 단절된 물갈이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무언가 일을 도모하고 최선을 다하기 위해 필요한 건 시간이다. 이 시간이 보장되어야 관점을 세울 수 있고, 관점이 세워진 다음에야 유의미한 실험을 해볼 수 있다. 이 오랜 과정이 있어야만 공간이 확보되고, 이제 그 공간을 통해 활동의 연속성을 보장한다. 지금껏 몇 번의 선거에 참여하며 앞선 자의 색깔이 얼마나 묻었는지에 따라 사람과 사업이 판단되고 또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부산은 이미 많은 청년이 떠나고 직업의 다양성, 삶의 다채로움을 모색하기 어려운 도시가 되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경험의 연속성마저 담보되지 않는다면 어떤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까. 누가 새롭게 시도할 수 있을까. 이번 겨울에도 우리 집 앞의 도로는 부서지고 새로운 보도블록이 깔리겠지만, 나는 일 년 내내 걷던 그 깨진 도로가 좋다. 매년 바뀌는 거리가 아닌 오래 기억할 수 있는 거리, 오래 기억할 수 있는 활동을 만나고 싶다.

청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