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동백꽃 잎에 새겨진 사연/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가신 님은 그 언제 그 어느 날에/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1963년 동아방송의 라디오 드라마를 이듬해 리메이크한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동명 영화 주제가인 이 노래는 이미자가 임신 9개월 만삭의 몸으로 서울 스카라극장 인근 목욕탕 건물 2층에서 방음방치를 한 뒤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녹음했다고 한다. 그만큼 ‘동백아가씨’의 운명은 기구했다.

남쪽 섬마을 처녀가 서울에서 내려온 대학생과 사랑해 미혼모가 되고 재회한 뒤 다시 이별하는 아픔을 그린 영화 ‘동백아가씨’ 주제곡은 당시 신인에 불과했던 이미자를 일약 스타 반열에 올렸다. 국내 가요 프로그램에서 35주 연속 1위를 기록했고, 음반 판매고는 엄청났다.

하지만 지금의 잣대로 본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분으로 ‘동백아가씨’는 세상 사람과 이별을 고했다. 박정희 정권이 이 노래를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돌연 방송금지 조치를 내린 탓이다. 트로트 선율이 일본 엔카와 비슷한 부분이 일부 없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그 결은 완전 다르다. 결국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 여파로 국민적 여론이 악화된 상황에서 ‘기다릴 일이 없으면 마음에 멍들 일도 지칠 일도 없을 것’이라는 억지 논리를 내세워 ‘동백아가씨’를 희생양으로 선택했던 게다. 1987년 금지곡들이 모두 풀리면서 우리 품으로 돌아온 ‘동백아가씨’는 숱한 화제를 낳았다. 독일 함부르크대학에서 동양학을 전공한 로미나가 2009년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왔다가 이 노래를 접하고 트로트 가수의 길을 택한 뒤 이미자의 수제자가 되는 영광을 안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동백아가씨’는 부산 서구 서대신동 출신의 작곡가 고 백영호(1920~2004) 선생이 빚은 작품이다. 그는 부산에서 ‘추억의 소야곡’ ‘해운대엘레지’ 등을 유행시키고 서울로 상경한 지 1년 만에 ‘동백아가씨’를 내놓았다.

내년 개관하는 부산근현대역사관에 ‘동백아가씨’ 악보 원본을 비롯해 고 백영호 선생이 1948년부터 작곡한 대중가요 자필 악보와 녹음 음반테이프 등 약 7000점이 기증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산실인 부산의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할 수 있는 반가운 소식이다.

강춘진 수석논설위원 choonj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