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명절을 보내고 맞이하는 휴일이다. 벌초에서 차례까지 일련의 의례를 마치고 난 후라 개운한 마음으로 가까운 해반천을 따라 김해평야로 나들이를 갔다.

김해는 도심 가까이에 너른 들판이 있어 좋다. 황금 들판 위로 하늘은 한층 높아져 있고 벌레 소리도 잦아들어 주위가 조용하다. 여기저기 잡초 속에 자유롭게 피어 있는 코스모스는 산들바람에 춤을 춘다.

둑길을 걷다 보면 농막이 보인다. 둑길 밑의 텃밭에는 배추를 심어 놓았다. 아마도 맛있는 김치를 담그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텃밭의 주위에는 호박이 익어가고 있다. 약간 시든 잎에 누런 호박이 여럿 달려 있다. 아직 덜 익은 초록빛 호박도 몇 개 보인다. 넝쿨과 같이 어우러진 풍경이 풍요롭다.

어릴 적 아버지는 고추밭 경사면에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퇴비를 듬뿍 넣고 호박씨를 묻었다. 날이 따뜻해지면 싹이 나오고 자라서 노란 꽃을 피웠다. 꽃에는 호박벌이 윙윙거리며 다리에 꽃가루를 묻히고 부지런히 꿀을 빨면서 수정을 했다. 나는 그 장면이 좋아 호박꽃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한참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앙증맞은 열매가 달리고 무더운 여름을 지나 서리가 내리는 늦은 가을이 오면 호박은 누렇게 익어 있었다.

아버지는 호박을 수확하여 리어카에 싣고 와 사랑방에 부려놓았다. 그러면 우리 식구는 겨울 양식으로 삶아 먹고 쪄 먹고 숟가락으로 속살을 긁어내어 부침개도 해 먹고 쌀가루를 풀어 죽을 쑤어 먹고 호박범벅도 해 먹었다. 가을이 와도 채 익지 못한 풋호박은 오가리로 오리거나 썰어 빨랫줄이나 축담 위에 널어 말려두었다가 반찬으로 만들어 먹었다. 사랑방에 누런 호박이 가득하고 호박오가리를 말리는 가을 풍경은 시골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나에게는 호박이 있는 잊지 못할 풍경이 하나 더 있다. 신혼살림을 허름한 빌라 전셋집에서 보내다가 조그만 아파트를 장만하여 이사한다고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전했다. 어머니는 이사 전날 저녁에 예고도 없이 누렇게 익은 커다란 호박을 머리에 이고 집 안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깜짝 놀라며 어머니께 여쭈었다. “어머니 웬 호박입니꺼?” “니가 내일 아파트로 이사한다고 안 캤나? 앞장서거래이 새 아파트로 가서 문 열거라! 오늘 밤은 이 호박과 함께 거서 잘란다. 그라면 좋다 안 카나”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어머니는 새 아파트에서 호박과 함께 주무셨다.

우리네 속담 중에는 호박에 관한 것이 참 많다. 호박이 우리의 생활과 참 가까이 있다는 증거다. 그중에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떨어졌다’는 속담은 누구나 알고 있다. 어머니는 이 속담처럼 행운이 집안으로 굴러들어와 자식 잘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것은 어머니만의 신성한 의식 같은 것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어머니의 마음을 그 무엇에 견줄 수 있을까?

어머니의 이런 정성 어린 염원처럼 가을은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이 필요한 계절이다. 가을걷이한 곡물로 베풀어준 대자연의 신에게 감사를 드리고 내년에도 더 잘되길 기원하는 때이기도 하다. 문득 ‘주여, 때가 왔습니다’로 시작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이사를 마친 후에도 그 늙고 큰 호박은 한동안 현관 앞 신발장 위에 놓여 있었다. 출퇴근 때마다 그 늙고 큰 호박을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그 일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파트에서 아이들 다 키우고 여태까지 무탈하게 살고 있다. 부자는 못되었지만 큰 복은 지금부터 굴러들어올 것 같은 예감도 든다.

우리도 코로나를 피해 호박이 있는 가을 풍경을 찾아 나서보자. 바람에 미루나무 고개 숙이는 밭둑가 호박도 좋고 하얀 억새가 핀 산비탈 호박도 좋고 시골 담장에 탐스럽게 매달린 호박도 좋고 하다못해 재래시장 채소가게에 진열된 호박이라도 좋으리라. 실한 놈 한 덩이를 구해 집안으로 들이면 좋지 않을까? 들여놓고 호박을 보며 부자가 되는 생각을 해도 좋을 것이다.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