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끝난 후 들른 매장이다. 제사도 못 지내고 문 열었는데 ‘맹탕 장사’였다는 매장 점주의 땅 꺼질 듯한 푸념을 뒤로 한 채 한쪽 구석에 놓인 바구니로 향했다. 유통기한 지난 제품이 없길 바랐지만, 순간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날짜 지난 제품이 바구니에 가득했다. 본사가 반품을 받아주지 않으니 회수하는 제품만큼 생돈 날리는 셈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심정으로 매장을 나와 버렸다.
서러운 마음에 눈 뜨니 꿈이다. 며칠 전 아내가 보여준 12년 전의 약속어음 때문에 이런 꿈을 꾼 것이었을까? 식품유통 대리점 하던 2009년 6월 말에 거래처에서 받은 두 장의 부도난 약속어음이 문제였다. 당시 발행 총액이 500만 원이 되지 않았지만, 나에겐 몇 천만 원의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거래처는 나의 열정이 서린 곳이었다. 신축 아파트 단지 외진 지하상가에 있던 그 점포가 정상화되기까지 2년이라는 세월을 개점부터 함께했다. 그동안 팔리지 않아 폐기한 제품과 퍼부은 행사비 등으로 적자가 불어나도 상권이 살아나길 바라며 감내해 왔던 거래처였다. 부도난 금액만큼 본사 결제액을 다시 메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난도질 당한 듯 아렸다. 해운대 신시가지에 대형유통업체가 들어오면서 겪게 될 불행의 서막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따금 지난날 납품하던 시절이 꿈에 나오면 슬펐고 꿈 깨면 한참이나 먹먹했다.
옛말이 되었지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다. 납품업 현장은 나아졌을까? 납품 현장에 가면 귀에 딱지 앉을 정도로 듣는 말이 있다. 해운대에서 식자재 유통을 하는 이수종 사장은 “그동안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정책 사각지대에 놓여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했다. 우리 같은 납품업자들은 소상공인 대부분이 받는 코로나 소상공인지원금을 한 차례도 받은 적 없다. 우리는 시민도, 국민도 아니냐”며 세상의 무관심에 서러움을 토해냈다.
지난 6월 말 부산시의회는 납품차량 주정차 위반 처분유예, 납품경쟁력 강화 등의 지원정책을 담은 ‘납품도매업체 지원에 관한 조례’를 우여곡절 끝에 재의결했다. 그동안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던 납품업자들의 기대는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면서도 부산시가 엇박자 행정을 펼칠지 모른다는 걱정에 조마조마 마음을 졸였다.
부산시는 납품업자의 이런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로교통법에 지자체가 할 수 있는 ‘유예’ 규정이 없다며 일부 조항을 문제 삼아 행정안전부의 지침대로 무효 확인의 소와 집행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시가 시의회와 사전에 협의하지 않고 중앙 부처의 입만 쳐다본 결과다. 납품업자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시의 무책임한 행정에 할 말을 잃었다.
애초 조례 제정을 추진하지 않았다면 납품업자들은 더 나은 사업 환경을 꿈꾸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포기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들에겐 조례가 되레 소금물을 들이킨 듯 갈증만 유발한 ‘못 마실 오아시스 물 한 모금’이었다. 어떠한 생명수도 지원되지 않는다.
시는 시민의 생명을 지킬 수 있을까? 신고리원전 반경 30㎞ 이내에 부산 인구의 70%가 거주한다. 그러나 시장에게는 원전 사고 시 긴급 대피 권한조차 없다. 결정권자는 중앙정부의 원자력안전위원회 현장방사능 방재지휘센터장이다. 주민 피난을 위한 비상대응계획을 이해하고 활용해야 할 대상인 피해지역의 지자체장, 주민, 사업자 등이 빠져 있는 구조다.
지방자치제가 도입된 지 30년이 되었지만, 지방자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자치입법권은 법률 등 상위 법령 제약으로 인해 자율성이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다. 2019년에 시민사회는 ‘조례의 역습’을 통해 중앙의 불합리한 법령 체계를 극복하고 조례 제정을 통해 자치입법권을 강화·확대하고자 시도한 적도 있다.
자치입법권을 가진 시의회가 현장 고충을 조례로 담았지만, 부산시 스스로 자치행정권을 걷어차버렸다. 시민의 아픔을 헤아렸다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현장을 먼저 찾고 시의회와 문제 해결에 나서야 했다. 사실상 지역과 현장의 고통이 행정의 고통으로 느끼지 않음이다. 공감이 있었다면 해결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을까? 현장의 처지를 행정 자신의 곤경으로 여기고 공감한다면 행정의 문은 열릴 것이다. 행정은 현장 공감이 먼저이니까.
(사)중소상공인살리기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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