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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동네 시장 /정희경

  • 정희경 시조시인
  •  |   입력 : 2021-08-31 18:47:34
  •  |   본지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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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한풀 꺾이는 저물녘에 장바구니를 챙겨 집을 나선다. 대형마트와 인터넷 쇼핑도 이용하지만 나는 우리 아파트 뒤에 있는 동네 시장에 자주 간다. 꼭 생필품을 사러 가는 것만은 아니다. 그곳에는 사람 냄새가 있고 내 작품의 소재들이 즐비하여 덤이 많은 곳이다.

오늘은 미장원에 먼저 들른다. 의자에 앉으면 말하지 않아도 여느 때처럼 커트를 깔끔하게 해준다. 미장원은 내 정보통이다. 원장은 머리를 다듬으면서 연신 정보를 쏟아 놓는다. 아파트값이 얼마나 올랐는지, 옆 아파트는 언제 재개발하는지, 족발집이 어디로 이사 갔는지….

“오랜 날 기다린 듯 끈 풀린 수다들이/해가 긴 오후만큼 끝없이 늘어지고/미용사 장갑 낀 손만 귀 닫고 한창이다” (장남숙의 시조 ‘진 헤어살롱’ 둘째 수)

유쾌한 수다와 정보를 한 보따리 챙겨 나와 노점에서 부추를 한 단 산다. “새댁, 풋고추 썰어 넣고 전 부쳐 봐. 매콤하게 맛나” 오늘도 풋고추를 덤으로 주시는 손길이 고맙다. 어르신은 늘 나를 새댁이라 부르신다. 결혼한 지 까마득한데 아직도 새댁이라니, 하기야 이 노점상의 단골이 된 지 20년이 넘었고 처음 어르신을 뵈었을 때 나는 새댁이었다. 어르신의 노점상은 이미 이 시장에서는 어엿한 가게이다. 새삼 오랜 시간 어르신에게 옆자리를 내어준 은행이 고맙다. 이 가게에서 나는 오래도록 새댁이고 싶다. 부침가루를 사러 마트 문을 밀자 시원한 냉기가 쏟아진다. 상냥한 점원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한다. 배달을 기다리고 있는 노란 바구니들이 정겹다.

마트 옆에 아이스크림 가게가 새로 문을 열었다. 국숫집도 옷집도 몇 달을 못 견디고 가게가 자주 비어 그쪽으로 늘 시선이 가던 곳이다. 분홍빛 간판이 산뜻하다. 우리 동네의 어느 가게든 오래도록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아! 그런데 무인점포다. 셀프 빨래방, 셀프 주유소는 이제 익숙해졌지만, 무인점포는 낯설다.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가게에 들어선다. 아무도 없다. 아이스크림 종류도 많고 과자도 많이 진열돼 있다. 아이스크림 몇 개를 고르고 기계 앞에 서서 음성 안내에 따라 바코드를 스캔하고 카드를 넣어 계산하고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가게를 한 번 더 둘러보았다. CCTV가 나를 지켜보고 있어 얼른 나오고 말았다.

무인점포는 주로 젊은 층이 많은 곳에 들어서는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내가 사는 평범한 동네에까지 들어온 걸 보니 무인점포가 우리 일상을 파고드는 것이 확실하다. 인건비를 줄여서 소비자에게 그 이익을 돌려주는 일환으로 물건값이 싼 점은 좋다. 누구 눈치 안 보고 물건을 고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비대면 시대가 가지고 온 또 하나의 긍정적 풍경이다.

그러나 인간의 설 자리가 이제 또 하나 없어진다는 쓸쓸함이 남는다. 자동문 버스가 나오면서 그 많던 버스 안내양이 사라졌다. 여고시절 만원 버스에서 비집고 나올 듯한 우리를 두 팔로 감싸 안고 문을 닫던 안내양 덕분에 지각하지 않았다. “가득 넣을까요”라며 늘 반갑게 맞아주던 주유소 청년도 사라졌다. 톨게이트에서 표를 찾느라 당황하던 나를 기다려주던 그 언니들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옆 식육점에 들른다. “국거리 기름이 적은 것으로 600g 주셔요. 그리고 육전거리도 지난번보다 좀 얇게 썰어 주셔요” 오늘따라 내 주문이 세세해진다. 기계는 절대로 소화할 수 없는 주문이다.

“장마가 끝난 오후 요염해진 햇볕 따라/희미한 문패마냥 난전을 기웃대면/푸성귀 시어詩語 한 다발 반짝이며 읽힌다” (정현숙의 시조 ‘재래시장’)

재봉틀 하나로 자식을 키우셨다는 옷수선집 아줌마, 새벽에도 김밥 한 줄을 말아주시는 할머니, 우아한 모습이 백합 같은 꽃집 언니, 어눌한 말투가 더 정겨운 과일가게 총각, 커피를 먼저 건네주시는 금방 사장님…. 어려운 시기일수록 이분들의 엷은 미소에는 부지런함과 치열한 삶의 의지가 빛난다. 그것은 내 일상에 활력이 된다. 꿋꿋하게 삶을 꾸리는 이분들을 나는 오래도록 만나고 싶다.

시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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