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여든 둘의 영조가 세손(世孫, 正祖)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고 말을 꺼낸 것은 상식에 부합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대리청정 이야기를 꺼낼 때면, “아직 성상께서는 건강하시니 대리는 필요치 않다” “세손은 노론이니 소론이니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없다”는 말로 가로막고 나서는 자들이 있었다.
사실상 정조의 왕위 계승을 반대한 것이다. 반대세력을 꺾은 사람은 서명선(徐命善)이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우의정 홍인한(洪麟漢) 일파는 사실상 세손의 정당한 왕위계승을 반대하고 있다고 직격했던 것이다. 상소 한 장의 공으로 서명선은 뒷날 영의정까지 오른다.
홍국영(洪國榮)은 세자시강원 사서(司書)였다. 그는 당시 모든 모해(謀害) 공작으로부터 정조를 보호하면서 순조로운 왕위 계승을 기획했고 그 기획을 실행에 옮겼다.
서명선의 상소 역시 홍국영의 기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상소를 올린 행위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홍국영이야말로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사람이라는 것이 당시 중론이었다.
서명선이 상소를 올린 날은 12월 3일이었다. 정조는 해마다 12월 3일이면 자신을 도왔던 홍국영과 서명선, 정민시(鄭民始) 등을 규장각으로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다.
1778년의 그날에도 홍·서·정 등 6명을 불렀고 풍악을 잡혔다. 술이 들어가자 서로 손을 잡고 농담을 하였다. 평소 술을 입에 대지 않는 정조도 술을 한 잔 마신 뒤 이렇게 말했다.
“경들이 서로 손을 잡았으니, 또한 내 손도 잡으라. 대개 선조(先朝, 英祖) 때 왕왕 신하들의 손을 잡은 경우가 있었지만, 손을 내어주며 잡으라고 명한 적은 없었으니, 지금 이렇게 손을 잡으라 한 것은 더욱 보기 드문 예우인 것이다.”
영조는 이따금 신하들의 손을 잡는 경우가 있었지만, 자신처럼 직접 손을 내어 주면서 신하들보고 잡으라고 한 경우는 없었다는 것이다. 홍국영은 아마도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정조는 왕이 된 뒤 홍국영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었다. 정조는 홍국영에게 ‘거병범궐(擧兵犯闕)’ 곧 군대를 동원해 궁궐로 쳐들어오는 일만 아니라면, 결코 죽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까지 했다고 한다. 과연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홍국영은 출세의 정점에 섰다.
모든 것은 도승지 홍국영을 통해야만 왕에게 보고가 되었다. 홍국영은 숙위소(宿衛所) 대장이 되어 왕의 신변 보호를 맡는가 하면, 훈련대장과 금위대장까지 겸임하여 군권(軍權)까지 장악했다. 이처럼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그의 나이 불과 31세였다.
1779년 9월 26일 홍국영은 정조를 만나 모든 벼슬을 내려놓았다. 술을 마시고 정조의 손을 쥐었던 1778년 12월 3일로부터 불과 열달 뒤였다. 또 9월 26일은 그가 1772년 처음 정조를 만난 날이었으니, 그로부터 꼭 7년 뒤였다. 홍국영이 이날 벼슬을 내려놓은 것은 복잡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권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도리어 권력의 상실을 불러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자시강원 사서로 있던 홍국영은 권력을 자기 손에 쥐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인가? 조선이 유교국가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유가(儒家)의 정치의식에 입각해서 백성의 안녕과 복리를 위한 행정을 펼치는 것이 정답이었다.
하지만 정조가 왕이 된 이후 홍국영의 이력을 보건대, 그런 생각은 그에게 손톱만큼도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가 한 일은 권력을 휘둘러보는 일, 다른 사람이 자기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설설 기는 것을 흐뭇한 마음으로 내려다보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홍국영이 그 권력을 누렸던 것은 3년 6개월에 불과했다.
2022년 3월 20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다. 반년 남짓 남았다. 우후죽순처럼 후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오직 홍국영의 욕망을 품고 홍국영처럼 되려고 뛰어드는 자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를 엄밀히 검토하여 미래를 이끌 역량을 갖추기는커녕 한참이나 흘러간 과거의 가치관에 매몰되어 있거나, 지식과 견해가 보통 시민보다 훨씬 떨어진 자들도 나선다. 가장 빼어난 사람을 뽑기보다는 이런 자들부터 가려내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정치가 아니겠는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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