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기장의 달음산 북동쪽 산기슭. 행정구역상 기장군 일광면 원리인데, 지금은 잊힌 광산 하나가 있다. 과거 구리를 많이 캐던 일광광산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 내 5대 구리광산 중 하나로 꼽혔다. 한때 국내 광산 가운데 최대 생산실적을 올린 적도 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마을도 생겨났다. 일광광산 마을이다. 현재 마을 입구에는 ‘꽃 피는 마을 광산입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여느 시골 마을과 비슷한 이곳은 다름 아닌 국내 일제 강제동원의 역사적 현장이다.

일제강점기의 일광광산은 일광(日光)의 일본식 발음이 ‘닛코’인 까닭에 ‘닛코광산’으로도 불렸다. 당시 이 광산은 스미토모(住友)의 광산기업 계열사이던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가 운영했다. 스미토모라는 이름이 다소 낯설겠지만, 스미토모는 미쓰비시(三菱), 미쓰이(三井)와 한통속이었다. 이들은 태평양전쟁 무렵 일본의 3대 기업집단(재벌)으로, 대표적인 전범기업이다. 스미토모의 모체는 구리 탄광 개발과 채광이었다. 이런 스미토모는 1930년대에 조선으로 진출한다. 일광광산은 그중 하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전시총동원체제로 돌입했다. 일제는 1938년 5월 ‘국가총동원법’을 시행하면서 식민지 조선의 물자와 사람을 마음대로 징발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일광광산을 비롯한 군수물자 관련 작업장으로 내몰았다. 구리 광산 외에도 국내 방적·방직회사, 금속·화학공장도 여기에 포함됐다. 일제강점기 일광광산의 노무자는 200명 정도로, 가까운 일광과 좌천 등지에서 온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당시 채굴장에 동원된 이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4월 1일 일광광산 탄광에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왔고, 이들은 쉬는 날도 없이 매일 주간과 야간 2교대로 구리 채굴 작업에 투입됐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은 장안읍으로 가 군사훈련까지 받았다. 그러나 당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일광광산으로 끌려왔는지, 채굴 작업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이가 피해를 봤는지 등을 제대로 알 길이 없다.

다만, 일본 홋카이도의 고노마이(鴻之舞) 광산의 조선인 노무자 노동재해 관련 기록물은 참조가 된다. 악명 높았던 일제 강제징용 현장 가운데 하나로, 이 탄광 역시 스미토모에서 운영했다. ‘스미토모 고노마이 광업소’에 동원된 조선인은 모두 2563명. 1939년 10월 제1진부터 1942년 9월 제23진까지 입소했다. 고노마이 광산의 경우 일제의 조선인 강제동원과 관련해 방대한 자료가 남아 있다. 관련 문서는 1973년 폐광 이후 광산사무소 창고에 방치됐는데, 1978년 경제학자 모리야 요시히코(守屋敬彦)가 이를 발견했다. 자료는 2ｔ 트럭 5대 분량이나 됐다고 한다. 이를 통해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얼마나 가혹한 조건 속에서 일했는지 알 수 있다. 1939년 10월부터 1943년 3월까지 조선인의 재해사망자 비율은 일본인보다 배나 높았다. 고노마이 광산에서 발생한 사망자 47명 중 재해에 의한 사례는 30명이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은 최소한의 안전시설도 갖춰지지 않은 작업장에서 일하다가 크게 다치거나 숨졌고, 화약류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 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다.

엊그제는 광복절 76주년이었다. 앞서 지난 12일에는 전범기업 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이 일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주지 않겠다고 거듭 밝혔다. 위자료 지급은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에 의한 것인데, 일본 정부가 승인하지 않는 한 그 이행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제철은 한술 더 떠 “(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국가 간 정식 합의인 일한(한일) 청구권·경제협력 협정에 따라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제철이 ‘믿는 구석’은 일본 정부만은 아닌 듯하다. 한국 대법원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과 관련, 2018년 10월 1억 원씩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확정판결했다. 이 확정판결은 국내 법원에서만 13년이나 걸렸다. 피해자들은 2005년 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내 1·2심에서 패소했지만, 2012년 5월 대법원에서 승소 취지의 판결을 받았다. 이후 파기환송심과 재상고심까지 6년이란 세월이 또 흘렀다. 그 사이 박근혜 정부와 양승태 사법부 간 ‘재판 거래’ 의혹도 불거졌다. 그런데 지난 6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에서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뒤집는 1심 판결을 내놓았다. 일제 강제노동 관련 소송의 ‘공소시효’ 기준도 국내 법원마다 ‘2018년 10월’과 ‘2012년 5월’로 제각각이다. 지난 15일 열린 광복절 76주년 경축식 기념사에서 김원웅 광복회장이 “촛불혁명으로 친일에 뿌리를 둔 정권은 무너졌지만, 기득권 구조는 여전하다”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럴 때 ‘역사와 정치’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편집국 부국장, 걷고싶은부산·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