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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어머니가 주신 책 /김이듬

  • 김이듬 시인
  •  |   입력 : 2021-08-03 18:53:07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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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연을 끊을 생각을 했다. 지난 3월 초 아버지 장례식 치르고 늦봄에 49재를 지내면서 나로서는 도리를 다한 것처럼 느껴졌다. 어머니가 오래 다니시던 절에서 신도들이 놀랄 만큼 성대하게 49재를 올린 것도 어머니가 간절히 원했기 때문인데 그 비용까지 보태느라 나는 무척 힘들었다. 아버지는 오래 투병하셨고 내게 유산도 빚도 남기지는 않으셨다. 아버지는 미안했다고 사랑한다고 행복하게 살아달라고 유언을 남기셨다. 조금이나마 설움과 원망을 가지고 있던 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아버지 부재의 실감은 에둘러 배달된 소포처럼 더디게 오고 슬픔이 후회를 동반하여 밀려와서는 지속적으로 출렁인다.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간병하셨던 어머니의 심신이 무척 좋지 않다. 이따금 내게 전화하신다. 참고 참았다가 전화하셔서 내 안부를 물어보시는 걸 나는 안다. “이상하지 않니?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간다는 게….” 말을 잇지 못한 채 우신다. 내가 당신에게 다소 소원한 걸 느끼신 게 분명하다. 매달 생활비를 조금 보내드리지만 딸 얼굴이 보고 싶으신가 보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어머니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어느 날 연분홍색 한복을 곱게 입고 우리 집으로 찾아와 첩으로라도 살게 해달라고 하신 분인데 나는 그분을 어머니라 부르는 데 오래 걸렸다.

나의 생모는 집을 나가셨다. 아버지가 바람피우는 건 아셨지만 여자가 직접 찾아와 눌러앉으니 견딜 수 없으셨다. 어머니는 자살 대신 종교를 갖게 되셨고 총회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셨다. 여러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을 하셨는데 부산 영도에서 심방 가시는 어머니를 내가 길에서 기다리다가 만났다. 그때는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어머니는 놀라지도 않고 아침에 학교 갔다가 온 딸 맞이하듯 하셨다. 당시 어머니는 교회 사택에서 가난하게 살고 계셨는데 눈빛과 피부가 너무나 맑았다. 지금도 옷 서너 벌, 로션 한 개로 사시지만 아름답다. 지지난달에 넘어지셔서 허리뼈 두 개가 부러져 입원하셨다가 며칠 전에 퇴원하셨다. 나는 오늘 휴가 내고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언제나처럼 어머니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시다. 덥고 작은 방에 옛날 선풍기 틀어놓고 지팡이 짚고 주방에서 나를 위해 밥을 해두셨다. 조기 두 마리를 구우셨는데 우리는 깜빡하고 밥을 다 먹고 나서야 알았다. 호박조림과 고춧잎무침은 짰다. 어머니는 평생 새벽기도와 공부와 이웃 돕기와 교회일 등을 하시느라 요리를 다 잊어버리셨나 보다. 나는 수박을 사다 나르고 냉장고가 작아서 반의 반 통만 사서, 삼계탕을 포장해가지고 놓아두고 용돈 조금 성경책 사이에 꽂아두고 나왔다. 기차 시간 임박해서.

나는 나 자신의 재능보다 더 크고 넓은 복을 받으며 사는데, 아마도 두 분의 어머니 기도 덕분인 듯하다. 나를 키운 어머니는 불심으로, 나를 낳은 어머니는 아멘아멘하며.

나는 생모를 일 년에 서너 번 뵙지만 매순간 만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내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가 저번에도 주신 성경책이 있는데 또 성경책을 주셨다. 이번엔 활자가 큼직한 걸로. 내게 노안이 온 걸 아신 것 같다. 상행선 기차 안에서 책을 펼친다. 오늘부터 조금씩 읽으면 연말까지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 책상 위 낡은 수첩과 몽당연필 사이 두꺼운 종이에 쓴 시 한 편이 놓여 있었다. 정갈하고 반듯한 글씨로 옮겨적은 것이다. “누가 베껴 쓴 거예요?” “나이들수록 이 시가 더 좋아져서”라며 웃으시던 어머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로 시작하는 윤동주의 ‘서시’였다.

나도 어머니가 사랑해 암송하는 시를 쓰고 싶다. 책방 일이 조금씩 몸에 익어가니 겁이 난다. 유능한 소상공인보다 창작을 놓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은데. 기차 창문으로 노을이 스며든다. 해가 지는 시각엔 어릴 적 골목에서 두리번거리던 때처럼 외로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이젠 안 이럴 때도 됐는데.

시인·책방이듬 대표·한양여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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