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았는가? 눈이 얼마나 수북이 쌓여 소락테 산정이 희게 빛나고 있는지, 신음하는 숲은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계곡은 혹한에 얼어붙었다. 화덕에는 장작을 가득 채워 추위를 쫓고 술 항아리에는 술을 넉넉히 걸러두어라’.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로마에서 바라본 소락테 산의 겨울을 노래한다. 호라티우스는 일상에 주목한 흔치 않은 시인이다.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제사 모시는 일은 문학의 이야깃거리가 되지 못했다. 최초의 서양 문학 ‘일리아스’는 전쟁터에서 벌어진 갈등을 다루고,‘오디세이아’는 전쟁을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에서 전개된다. 두 장수의 언쟁으로 야기된 참혹한 전투와 죽음,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에서 전우들을 모두 잃고 홀로 귀향하기까지의 모험과 사랑이 다루어지는 이야기에서 일상은 겨우 삽화 정도였다. 일상이 비로소 이야깃거리가 된 것은 헬레니즘 시대였고, 이때 시인들은 전쟁과 모험의 ‘사건’을 일부러 회피하고, 소박하고 작은 것들의 이야기를 찾았다.

호라티우스는 로마의 나른한 하루를 노래한다. 시장을 찾아 채소와 밀의 가격을 묻고, 사람 홀리는 대경기장을, 저녁 땅거미가 내리는 로마 광장을 종일 쏘다니고 점쟁이를 구경한다. 집으로, 부추와 병아리콩과 과자 접시 곁으로 돌아와 노예 셋과 저녁을 마련한다. 흰색 돌 탁자에 술잔 두 개와 술 국자가 놓였는데, 그 옆에 싸구려 소금 종지, 호리병과 대접, 캄파니아 가재도구가 있다. 오전 9시까지 누웠다가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즐거운 적적함 속에 글을 쓰거나 안마를 받는다. 따가운 태양에 지쳐 마르스 광장과 공놀이를 피해 목욕탕으로 달아난다. 점심은 과하지 않게, 진종일을 보내는데 허기지지 않을 만큼만 먹으며 여유롭게 집에 머문다.

시인은 고단한 밥벌이를 노래하기도 한다. 내전에 패한 쪽에 가담하였기에 사면령이 내려진 후에야 간신히 로마에 돌아왔을 때 빈털터리 신세로 그는 밥벌이를 위해, 새벽부터 카피톨리움 언덕을 올랐고, 북풍이 대지를 할퀴고 눈 내리는 동짓날에도 언덕을 올라야 했다. 엉켜 싸우고 사람들을 험하게 제쳐야 했고, 새벽의 어둑한 언덕에 도착하면 수백의 청탁이 머리 주변, 옆구리 둘레에서 날뛰었다.

때론 나른하거나 고단한 하루에 성가신 ‘사건’들이 끼어들었다. “혹자는 보증을 서달라 하고, 혹은 제 글을 열 일 제쳐두고 들어 달라 합니다. 퀴리누스 언덕에 하나가, 또 하나는 아벤티누스 언덕 끝에 몸져누워 있어 둘을 문병해야 합니다. 오가기 참 불편하게 떨어져 있습니다. 저기 집 장사가 나귀와 일꾼을 데리고 가고, 큰 기중기가 석재를 나르고 목재를 옮기고, 슬픈 장례행렬이 묵직한 짐차와 길을 다툽니다. 여기 성난 개가 짖고, 저기 돼지가 뜁니다.”

시인으로 유명해진 호라티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주변의 거물들과도 친분을 쌓았고 같이 여행도 했다. 그의 브룬디시움 기행문은 기원전 38년 이탈리아 남부의 항구 브룬디시움에서 안토니우스와 아우구스투스 양쪽의 대표자들이 내전 종식을 위해 만나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시인은 ‘사건’에 관심이 없다. 못돼먹은 여관 주인들, 성가신 각다귀 떼, 시끄럽게 우는 늪지 개구리들, 술에 흠뻑 절어버린 뱃사공과 노래 대결을 펼치는 나그네, 풀을 뜯으라고 노새를 풀어놓고 코를 고는 선원, 페로니아의 맑은 샘물, 눈병에 걸려 눈에 바른 검은 연고, 굶주린 여행객들, 저녁 식사와 함께 불타버린 부엌 등 정치와 무관한 이야기들뿐이다.

요즘 세계적 관심사는 그야말로 일상 회복이다. 구글 뉴스 검색에 알아보면, 국내에서만 약 10만 건의 기사가 일상 회복을 언급했다. 우리 일상이 코로나 19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모임과 영업이 제한되고, 야구나 영화 관람도 자유롭지 못하다. 식당에 가는 것도, 버스나 전철을 타는 것도 조심스럽다. 벌써 2년째 우리 삶의 필수적인 일부만을 가동하면서 버티고 있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다가 다시 퍼지길 반복한다.

일상이 무너진 우리 삶에서 아직 가동되는 부분은 무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목숨만 이어가니 목숨이라고, 숨만 쉬고 있으니 숨이라고 부를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우리는 어쩌면 원래의 일상을 되찾은 건지도 모른다. 다음날 이야깃거리를 남기는 뜨거운 술자리는 진작 접었고, 너무 먹어 허리둘레를 걱정할 결혼피로연 회갑연 돌잔치는 간소하게 치렀으며, 여름 겨울방학으로 여행을 위해 드나들던 인천공항을 가본 지 오래지만, 무너졌다는 일상의 그 부분은 어쩌면 ‘부풀려진 일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19의 불운 속에서 그나마 위안은, 부푼 일상의 과잉들이 덜어지면서 먹고 마시고 옷 입고 식구 건사하고 제사 모시는 일상의 가려졌던 모습을, 그 심심하고 나른하고 평화로운 삶의 가능성을 우리가 덕분에 보았다는 것이다.

정암학당 연구원·로마문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