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기대가 생긴다. 지루한 역병의 팽배한 불안 속에 조심스레 기쁘다. 걸어서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새 도서관이라니. 들뜬 감각기관들이 긴장하기 시작한다. 새 책 냄새, 새 건물 냄새가 환각으로 다가온다. 상상 속 멋진 도서관의 이미지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 후각이 적극적으로 예민해진다. 상상의 코가 킁킁거린다. 촉각도 한 몫 하고 싶은 것일까. 손이 허공의 페이지를 넘긴다. 마치 허공이 책이라도 되는 듯.

알라딘의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거대한 상상의 손이 책 속에서 나타난다. 도시 만들기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손이 공간을 만들기 시작한다. 도서관 만들기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자연채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열람실, 조용한 열람실, 시끌벅적한 열람실, 광장과 동굴과 미로를 연결하며 상상의 열람실들을 바쁘게 만든다. 환기가 잘되는 강당과 전시를 할 수 있는 작은 갤러리도 만들까. 지역시인과 작가들을 위해 창문 앞에 책상이 놓인 작은 일인용 독립 작업실도 서른 개쯤 만들어야지. 나지막한 가벽을 세워 앉으면 보이지 않게. 건축물의 외관은 거의 완성된 모양새다. 금샘도서관. 조감도가 금정구청 로비에 나붙을 때부터, 공사과정을 관심있게 지켜본다. 입지가 독특하다. 산성터널의 연장선인 윤산터널 위, 반쯤 공중에 떠 있는 도서관이다. ‘공중사원’ 제목의 시를 쓴다. 터널 위 도서관의 은유이다. 뿌리 뽑힌 것처럼 땅에 발붙이지 못하고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날들이 문득문득 닥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기도로 꽃을 피울 것이다. 책을 읽는 일, 또한 일종의 기도일 것이다. 간절한 기도, 유쾌한 기도, 숭고한 기도일 것이다. 이 책의 집이야말로 기도의 사원일 것이다.

문학은 밥벌이나 성공과는 무관한 것들로 구성된다. 문학은 도대체 무엇에 써 먹히는가. 답은 간단하다. 문학은 삶 그 자체를 직면하게 한다. 문학은 인생의 본질을 그려 보인다. 도구나 수단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목적으로서의 삶을 과정으로 그려 보인다. 스스로 최선인 자신을 긍정하게 하고, 어려움 앞에서 지레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힘이 된다. 나아가 존재 그 자체를 지속 가능하게 한다. 어린 시절 충분히 읽은 책은 우울과 절망에 처한 청년을 살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백신이다. 문학 안에는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개연성 있게 상상력과 버무려진다.

높낮이와 길이가 음악이 되듯, 굴곡의 기록이 문학이 된다. 문학은 삶의 굴곡의 기록이다. 엎어지고 자빠진 인간의 기록이다. 슬픔의 기록, 가난의 기록, 고통의 기록, 고난의 기록이다. 때로는 부조리의 기록, 찌질함의 기록, 어리석음의 기록, 회한의 기록, 반성의 기록이다. 현실과 환상이 결합되어 이 모든 것들이 인간에게 일어날 법한 일이라는 것을 그려보인다.

책 읽는 사람은 많은 삶을 산다. 문학 속에서 그는 수많은 전쟁을 겪고 여러 번 죽는다. 성정체성으로 수용소에서 죽을 뻔한 동유럽의 청년이다.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이 되고, 가난한 프랑스 소녀여서 중국인 남자를 사랑하고 이별한다. 졸지에 고아, 런던의 소매치기가 된다. 왕의 무덤에 순장 당한다. 명예살인 당한다. 아들만 존중하는 아버지, 셰익스피어에 의해 교육의 기회가 박탈된 딸이다. 사랑 때문에 몰락하는 전도유망한 청년이다.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사건이 현실에서 생기지는 않는다. 책 속의 비극은 현실의 비극을 견딜만하게 만든다.

백신의 예기지 않은 부작용처럼 독서에도 더러 부작용이 생긴다. 예를 들면 현실감이 떨어지는 시인이 되어버리는 일 같은 부작용 말이다. 시는 어쩌면 독서로 인한 발열이나 혈전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에서 항체가 생기지만 드물게 정신의 불수가 오거나, 영혼의 가출 단계에 이르는 부작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서로 인한 부작용이 생길 확률은 번개에 맞아 죽을 확률 보다 낮을 것이다. 독서는 가장 안전한 백신이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육각형 방들을 품은 영원과 불사의 공간, 가슴을 뚫고 가는 긴 허공을 굳건히 딛고 선 영혼의 정원, 금어가 노니는 새 도서관이 온다. 반겨 맞이하라.

최정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