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전, 치악산 둘레길을 걷다 밭둑 머리의 제법 큰 나무 그늘에 배낭을 내렸다. 작은 볼 일이 급했던지라 산비탈 쪽으로 걸음을 옮겨 얼른 일을 보고 난 뒤, 어슬렁어슬렁 나무 그늘로 돌아와 풀밭에 앉았다. 워낙 더운 날씨여서 땀도 닦고 물로 목을 축이니, 그제야 눈앞의 것들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민가와는 좀 동떨어진 곳이었기에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밭둑에 감나무라!’ 하고 눈을 들어 가지들을 찬찬히 살폈다. 감꽃 피는 시즌이 지났나, 어땠나? 혼자 달력 셈을 해가며. 이미 꽃피는 시절은 지나 조그만 열매를 달기 시작했는데 가만히 살펴본바, 이파리가 감잎과는 조금 달랐다.

어릴 적 고향 집엔 커다란 고욤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이맘때면 그늘을 드리워 나무 아래 멍석을 펴놓고 곧잘 놀곤 했다. 어른들은 그 나무를 ‘기얌나무’라고 불렀는데, 언뜻 보면 감나무와 흡사했다. 열매를 달기 시작할 때쯤의 모양은 더더욱 그렇다. 감나무와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을 때는 가을 무렵이다. 고욤이란 과실은 다 자라봤자 크기가 도토리만 하기 때문이다. 고욤 열매는 푸를 땐 엄청 떫지만, 늦가을에 따서 시렁에 쟁여 두면 자흑색으로 변하며 단맛이 최고조에 이른다. 초가를 개량하면서 그 나무가 없어진 후에야 정식 이름이 고욤나무라는 걸 알았다.

문득 옛 생각이 떠올라 이 나무가 고욤나무인지 감나무인지 알고 싶었다. 벌떡 일어서 잎을 훑어본즉, 역시 감나무와는 달랐다. 열매는 이제야 맺기 시작해 구별하기 어려웠으나 잎이 달랐다. 감잎은 넓은 타원형에 가깝지만, 이 나무의 잎은 긴 타원형이었다. 또 지금쯤의 감나무 잎은 말간 연녹색에 가까운데, 이 나무의 이파리 뒤쪽은 회색기가 돌았다. ‘이건, 고욤나문데!’

돌이켜 보건대, 사람들은 고욤나무를 감나무만큼의 가치로는 여기질 않았다. 고욤 열매도 달긴 하나 과실의 크기가 작아, 그다지 경제성이나 구황 기능은 없었기 때문일 터다. 고향 집에서도 그게 값어치가 있어서 애지중지 키운 게 아니라, 애초부터 옆집과의 경계선 기능으로 심어진 것이어서 거저 그늘을 이용하고 과실을 따 먹는 정도였다. 이 고욤나무도 다른 밭과의 경계를 짓고자 밭둑 머리에 심어졌는지는 모르겠다만, 여하튼 고욤나무의 다른 가치를 깨달은 건 성인이 되고 나서였다.

대개의 도시 사람들은 홍시나 단감을 먹고 난 뒤 그 씨앗을 심으면 일반적인 감나무로 성장하는 것으로 알 테다. 하나 발아시켜 그대로 키우면 돌감나무밖에 되질 않는다. 물론 돌감도 홍시로 만들어 먹으면 달긴 하지만, 크기가 작아 경제성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럼 우리가 통상 먹는 반시나 단감의 성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들 감나무의 묘목을 잘라 고욤나무에 접을 붙여서 키운다. 즉 고욤나무가 대목(臺木, 접붙일 때 근간이 되는 나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다른 식물로 예를 들자면, 참외나 수박은 호박을 접붙여 키운다. 그래야 넝쿨이 튼실하고 과실을 크게 만들 수 있으니까. 그러려면 참외나 수박 모종과 똑같이, 호박 모종도 잘 키우고 잘 관리해야 한다.

이 밭둑 머리의 나무가 고욤나무라는 걸 알게 되자 새삼 드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만 잘났거나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긴다. 그뿐이랴. 다른 사람의 능력을 키우는 데 일조하기는커녕 되레 질투와 시기로 동료나 주변 사람을 깎아내리기 일쑤이지 않은가. 대목 역할 해주는 이가 없으면(그런 사람이 있었음에도 잊는 경우가 더 많고), 저 하나로는 자라봤자 돌감밖에 되질 않는데도.

그러나 고욤나무는 사람의 계산으로 경제성이 있든 없든, 가을에는 조그만 열매로나마 인간을 비롯한 뭇 새들에게 양식을 제공한다. 그리고 반시가 되든 단감이 되든, 접붙이 된 나무에 자신을 최대한 바쳐 튼실한 과실을 맺게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세상에서 어떤 대목 역할을 해야 하나? 고욤나무가 던진 화두에 제대로 걸려든 느낌이다.

문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