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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쓰면 달라진다 /김재원

  • 김재원 동화작가
  •  |   입력 : 2021-06-15 19:42:32
  •  |   본지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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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 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30년이 넘은 육아일기를 보았다. 큰딸이 태어날 때부터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아내가 쓴 일기다. 아내가 팔을 다쳤을 때는 내가 대신 쓰기도 했다. 큰딸 몫이 대학노트로 6권이나 되고 둘째와 셋째 것까지 있어서 제법 자리를 차지했다. 이사를 하면서 몇 번이나 버릴까 하다가 놓아두었는데 이제는 버릴 때가 된 듯했다. 큰딸은 미국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으니 한국에 몇 번이나 나와서 보겠는가?

버리기 전에 큰딸에게 육아일기 몇 쪽을 폰으로 찍어 보냈더니 엄마가 참 열심히 썼다며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서 감동이라고 했다. 차마 그 말을 듣고는 버릴 수가 없어서 다시 넣어두었다.

우리 애들은 특출하지도 않고 고만고만하게 자랐는데 아내가 쓴 육아일기 덕분인지 부모 속을 썩이지 않고 잘 컸다.

나 역시 평범한 아이였다. 공부를 아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림이나 운동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눈에 안 띄는 소심한 학생이었다.

그랬던 내가 달라진 것은 글을 쓰면서부터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도 위인(?)이 되고 싶어서 아버지에게 호를 지어달라고 했다. 동네 사람들에게 작명해주는 것을 종종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어처구니가 없다고 한 마디로 거절했지만 끈질기게 졸랐더니 마침내 ‘범초(凡草)’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나는 그때부터 왠지 모를 자부심이 생겨서 일기장과 노트, 교과서 등, 내 물건이면 어디에나 호와 이름을 적어두었다.

그런 습관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거쳐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 번은 교감선생님이 학급 장부를 검사하다가 내 이름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뭐냐고 물었다. 내가 호라고 대답했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특별하지도 않은 사람이 호를 갖고 있으니 희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예반을 맡아 아이들을 지도하다가 나도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문학하고는 거리가 먼 왕초보였다. 소질은 없었지만 성실과 끈기를 무기로 삼아 열심히 썼다. 생각보다 재미가 있어서 학교에서 퇴근하고 돌아오면 밤늦게까지 습작을 했다. 그때까지는 내가 잘 하는 게 하나도 없었는데 비로소 열정을 갖고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

습작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자 전국 공모전에서 큰상을 받고 작가로 등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주위에서 이름 대신 ‘凡草 선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 혼자 부르던 호가 하루아침에 세상으로 날개를 달고 나갔다.

처음에는 교사가 내 신분의 상징이었고 밥벌이 수단이었는데 나중에는 동화작가가 나를 끌고 다녔다. 꽁생원이었던 내가 과감하게 사표를 쓰고 학교를 나온 것도 동화작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날마다 별 볼일 없는 하루가 지나간다. 아무 의미 없는 평범한 날들의 연속이다. 하지만 글을 쓰면 달라진다. 어제와는 다른 눈으로 보게 되고 색다른 일을 찾아서 기록한다. 무심히 지나치던 일상을 눈 여겨 보면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 글을 쓰게 된 뒤로는 의미 없는 날들이 없다.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새롭게 느껴진다.

글을 쓰니 책을 읽어도 더 깊이 있게 받아들인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예사롭지 않고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동물을 좋아했다. 식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풀과 나무를 좋아하게 되었다. 내 호에 풀이 들어 있는 걸 보면 글자의 힘은 정말 대단하다. 사람의 성향까지 바꿔 버리고 거대한 운명의 흐름까지 돌려놓았다. 다양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는 범초산장을 갖게 된 것은 내 의지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호가 나를 여기까지 이끌고 왔다.

쓰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쓰면 달라진다. 글은 위대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재원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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