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집안으로 들이고 거실 베란다를 바라본 나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고 이내 마루가 꺼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초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침에 울던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보름달보다 더 환하게 우리 집을 연분홍으로 밝혀주던 벚나무가 사라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가지가 잘려 3층인 우리 집 거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제 종일 집을 비우고 밤늦게 돌아왔는데 그사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지엽 시인은 시조 ‘해남에서 온 편지’에서 “복사꽃 저리 환하게 핀 것이 / 혼자 볼랑께 영 아깝다야”고 노래했다. 나도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멀리 있는 아이들에게 꽃 지기 전에 내려오라고 풍경 사진을 보내곤 한다. 지인들에게도 우리 집이 벚꽃 명당이라고 자랑해 왔다. 아파트에 이사 올 때도 18층을 고집하는 남편을 설득해서 3층을 선택한 것은 땅·나무와 더 가까이 있고자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아파트가 나이를 먹고 나무들이 자라면서 실현되었다. 3층까지 올라온 벚나무는 마치 액자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처럼 유리창 틀 안에서 분홍 연두 초록으로 색감을 선물해 주었다. 햇빛이 좀 덜 들어도 괜찮았다. 밤에 일렁이는 나뭇가지는 우리 집으로 들어와 생동감을 주곤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내게 많은 시적 영감을 주었다.

그런데 나무가 많이 자라자 주기적으로 자르는 작업이 시작됐다. 해충이 많아지고 아래층의 일조권 때문이라고 했다. 물론 아파트의 조경 전체를 고려한 선택이리라. 매년 나무들을 다듬는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마음먹고 뭉텅 자른 것이다. 다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야 할까?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아파트라는 공동주택에 사는 이상, 나무도 내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벌레가 끼이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아래층의 고충 해결 또한 우리 집이 나무로 누리는 호사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는 아파트 초입에 늠름하게 서 있던, 그래서 아파트 입구를 환하게 밝혀주던 몇십 년 된 은행나무가 송두리째 뽑힌 적이 있다. 동해남부선 때문이다. 동네 어귀를 지켜내던 몇백 년 된 당산나무처럼 나에게는 우리 아파트 표지석 같은 나무였다. 그 은행나무가 사라진 뒤 가로등이 세워졌지만 나는 그곳이 늘 어둡다고 생각했다. 베란다 창이 환해졌지만 당분간 나는 그때처럼 어둠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감내해야 한다. 나는 이웃으로 살기 때문이다.

이웃으로 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들은 많다. 이웃집의 공사도 내가 감내해야 하는 일이다. 아파트가 오래되어 고치는 집이 점점 늘어간다. 소식판에 언제까지 공사한다는 안내문을 붙이고 이웃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그래도 공사 기간 소음과 먼지에 시달려야 하기에 짜증이 나기 일쑤이다. 지난달에도 그랬다. 8층에 대대적인 공사가 있었다. 한 달 동안 소음에 시달렸고 엘리베이터가 공사 자재를 실어 나르느라 8층에 멈춰서기 일쑤였다. 공동현관 입구는 닦아내어도 먼지가 많이 쌓여 불편했다.

그런데 공사가 끝나고 며칠 후 우편함에 들어 있는 편지 한 통이 마음을 녹였다. “이번에 새로 입주하게 되어 인사드립니다. 오랜 기간 저희집 인테리어 공사로 인해 여러모로 불편을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한 마음입니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무사히 공사를 마치고 입주하였습니다.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마땅하나, 코로나로 인해 이 글로 인사를 대신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약소하나마 쓰레기봉투를 준비했사오니 댁내 묵은 근심 걱정 모두 담아 버리시고 늘 건강하고 평안하시기 바랍니다”는 예쁜 편지와 함께 쓰레기봉투 몇 장이 담겨있었다.

내가 이웃에게 배려했나? 부끄러웠다. 이사 오면 떡을 돌리던 풍습도 사라진 지 오래고 반상회도 사라진 지 오래다. 떡을 받은 것보다 더 뭉클했다. 이웃을 배려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고 또한 감각 있는 그들은 좋은 이웃임에 틀림이 없다. 좋은 이웃을 얻게 되어 기쁘다. 코로나가 잠잠해지면 벚나무가 사라진 거실에 환한 꽃가지를 꺾어 놓고 차를 한잔 나누고 싶다. 좋은 이웃을 얻는 기쁨, 좋은 이웃이 되는 기쁨을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함께 누릴 수 있으면 좋겠다.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