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억측한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마크 램지어의 글을 두고 비판과 성토는 이어진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중국위안부문제연구센터는 지난 28일 ‘일본군 위안부의 사실과 진상에 관한 국제 연구토론회’를 열었다. 천리페이 상하이사범대 교수가 “자신의 상상과 추리를 발휘한 선택적 구상”이라고 공박하는 등 여러 학자가 비판을 쏟아냈다.
지난 26일 원광대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주최 토론회에서 미국 이스턴일리노이주립대 이진희(사학과) 교수는 ‘일본의 오랜 역사 왜곡 작업의 결과물’로 분석했고, 하버드대 일본학연구소는 ‘…학문의 실증적 근거와 관련해 심각한 우려를 불러일으켰다’는 지적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일본의 전문가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명예교수, 오노자와 아카네 릿쿄대 교수 등도 지난 14일 일본 시민단체 ‘파이트 포 저스티스’ 주최 토론에서 램지어를 비판했다고 보도됐다.
위의 세 가지 사례가 갖는 의미를 순서대로 추리면 이렇다. ▷중국이 가세한 점(중국 연구진은 ‘위안부’ 실증 자료가 많고 국가 방침과 함께 움직인다) ▷‘일본의 오랜 역사 왜곡 작업의 결과물’의 흐름이라며 정곡을 찌른 점 ▷일본 내 비판적·양심적 목소리가 있는 점.
일본 극우와 한국 내 친일·혐한 세력과 싸우는 한국인인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는 저서 ‘신친일파’에서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을 조목조목 근거를 제시하며 비판했다. 마크 램지어가 내세운 ‘계약서에 따른 자발적 매춘부’ 주장은 ‘반일종족주의’에도 주요하게 나온다. 호사카 유지는 ‘자발적 매춘부’라는 식의 교활한 개소리를 비롯한 책 속의 여러 주장은 일본 극우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일본 극우의 한민족 경멸을 모아놓은 자료집으로 보면 될 책이지 달리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다.
작가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 제16권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집요한 것은 언제나 가해자다. 보복당하리라는 두려움이 있으니까 상대를 뿌리째 뽑아서 후환을 없이하려는 집념…죄를 짓게 되면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또 죄를 짓는다.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죄를 계속 짓게 되는데 그게 바로 형벌이라는 거야.”(116쪽 강선혜와 임명희의 대화 중) 강선혜가 제국주의 일본을 두고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램지어를 불쌍히 여기며 ‘토지’를 읽던 밤 나는 ‘집요한 가해자’라는 박경리 선생의 통찰에 숨이 막히도록 공감했다.
램지어를 궁글리는 동안 영화에서 곧잘 보던 ‘신체포기각서’가 불쑥 떠오르기도 했다. 사람을 궁지로 몰고 신체포기각서를 들이대 ‘도장’을 찍게 해놓고 “자! 이 서류가 있으니 이제 너는 자발적인 신체 포기자야”라고 우기면 신체를 자발적으로 포기한 게 되나? 현상 속 본질, 사실 속 진실을 보려고 끝까지 노력하는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램지어의 행동을 접하면서 ‘기습’이란 단어도 떠올렸다. 얘네들 또 옛날 버릇 못 버리고 ‘기획된 기습’이구나. 이스턴일리노이주립대 이진희 교수가 ‘일본의 오랜 역사 왜곡 작업의 결과물’로 이 사태를 분석한 점은 그래서 눈여겨봐야 한다. 일본은 열도를 벗어나 감행한 침략전쟁을 흔히 기습적으로 시작했는데, 최종 승리를 거둔 적이 없다.
초장에 전력과 자원을 쏟아부어 우위를 점하지만, 길게 끝까지 오래 싸움을 이어갈 명분(침략자에게 무슨 보편적인 명분이 있겠는가)도 철학(전쟁에서는 당장 써먹을 실질이 중요할 뿐 철학은 설 자리가 별로 없다)도 지구력(자원은 한계가 있다)도 없으니 일단 기습한 뒤 나중에 협상해 실리를 취하는 수법뿐이다. 그렇게 하자면 끝없이 명분을 억지로 만들어내야 한다. “‘위안부’는 자발적 매춘부”라는 집요한 억지가 나오는 본질 또한 여기 있다. 그러니 우리 대응책은 간단하다. 기습당해도 버텨낼 실력을 갖추면 된다. 그럼 우리는 안 진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연구로 잘 알려진 명지대 한명기(사학과) 교수가 쓴 ‘역사평설 병자호란’(전2권)은 2013년 1쇄가 나온 뒤로 19쇄를 찍었지만, 더 널리 읽힐 만한 책이다. 이 책 제2권에 ‘일본의 변신’ 단원이 있다. 병자호란(1636~1637)이 일어나 조선이 최악 상황에 내몰렸을 때 일본 쓰시마 도주와 막부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조선을 강력히 압박해 궁지에 몰린 조선에서 실리를 뽑아 일본으로 가져간다. 심지어 315쪽 그림설명은 이렇다. “1783년 변박이 그린 초량왜관의 모습이다. 일본은 병자호란 이후 수세에 처한 조선을 몰아붙여 1678년 이곳 초량으로 왜관을 옮기는 데 성공한다.” 일본 탓만 하자는 게 아니다. 저자는 국제관계의 냉혹함을 다만 들려줄 뿐이다.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냉혹한 이 현실에서 오늘 우리는?
선임기자 bgjoe@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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