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크 장편소설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인 고리오 영감은 구두쇠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어 본 독자라면 지독한 그의 경제관념 이면에 두 딸들에 대한 사랑이 녹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 사랑이 자린고비의 이미지를 가리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근거도 없이 단지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도 일말의 진실을 귀띔해주는 것이다. 소문이 한 번 굳어져 시간이 흐르면 편견으로 남고, 이 편견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인식의 창에 가늠자가 돼 언제든지 나타난다.

얼마 전 풍문으로만 듣던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이분을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했던 말들 가운데 공통적인 부분을 알게 됐다.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들의 논평은 단지 참조만 하되, 직접 만나 겪으면서 절로 헤아려지는 자신의 판단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사람에 대한 호오(好惡)를 떠난 객관적이고도 냉정한 관점이 요구된다. 그 사람을 한두 번 만나서 알게 된 점은 세인(世人)들의 평가와는 사뭇 달랐는데 어느 순간 사람들의 공통적인 평가가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도 별수 없이 여느 사람들과 다름없는 인식의 가늠자를 모셔온 셈이 된 것이다.

이럴 때면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나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나와 있을 때 나에게 주로 던지는 ‘사탕발림’식의 말과 내가 없을 때 나를 두고 평하는 차가운 관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누구나 그렇다. 좋은 말은 사람들에게 춤을 추게 하고, 쓰디 쓴 말은 기분을 상하게 한다. 외부에서 보면 소문처럼 보일지라도 내부에 들어가서 살펴보면 소문과는 다른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외부에서 볼 때 분명한 진실처럼 보여도 내부에 진입하면 그 진실이 굴절된 착오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정치적 허무주의는 오래전부터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정치가가 국민에게 심어준 이미지도 크지만, 무엇보다 국민 스스로 정치에 대한 믿음과 환상이 컸기 때문에 이런 인식을 가져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놈이 그놈이다’는, 선거 때만 되면 회자되곤 하는 국민의 정치가에 대한 오래된 ‘논평’이 또다시 고개를 드는 시절이다. 오래됐지만 결코 거짓일수만은 없는 이 ‘명제’는 때에 따라 ‘이놈이 바로 그놈’이라거나 ‘그놈이 바로 이놈’이라는 논리로 곧잘 둔갑하기도 한다. 전 부산시장의 과오에 이은 시장직 사퇴는 앞으로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보궐선거에 나서는 같은 당의 시장 후보에게 ‘과오’를 고스란히 전가한다. 바로 ‘그 당’ 소속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야당 후보는 이명박 정권의 4대강 사업과 관련한 국정원의 불법사찰에서 자유롭지 않다.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소문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밝혀지겠지만 시민의 오랜 ‘정치적 통념’과 ‘진실’이 밀고 당기는 팽팽한 긴장이 벌써 느껴져 흥미롭다.

소문의 속성은 마치 눈덩이를 굴릴 때처럼 눈뿐만 아니라 눈밭 위의 온갖 것들까지 묻혀서 커지는 데 있다. 순수하지 않다는 말이다. 소문의 형식은 진실에 덧칠한 붓질처럼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지럽고 혼란하다고 해서 ‘소문의 담론’에는 진실이 빠져있다고만 단정해서도 안 된다. 소문으로 드러난 사실과, 진실의 눈으로 파헤치고 구성한 사실은 다르다. 전자는 말 그대로 실제로 일어난 사실 자체인 반면에 후자는 사실 자체를 포함한 사실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 관계는 진실 관계이기도 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를 보여준 프로이트의 ‘빙산의 이론’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소문의 근거는 특정한 사실이다. 특정한 사실은 소문의 물결을 타면서 굴절되고 때를 묻힌다. 이상한 일이지만 사람에게는 소문 자체를 사실로 믿고 싶어 하는 심리가 있다. 왜냐하면 단지 소문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소문으로 말미암아 하나씩 풀리게 될 무성한 ‘소문들’의 진위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소문이 소문을 몰고 올 때 사실은 점점 분명해지는 게 아니라 점점 흐려진다. 사실이 흐려지면 사실을 낳게 한 진실 관계가 은폐될 수밖에 없다.

또 다시 오랜 관행처럼 우리 머릿속에 들어올 정치적 허무주의를 4월 재보선 선거를 앞두고 생각해본다. 시민, 아니 국민은 다시금 정치가들에게 혼이 빠진 듯한 열광과, 아니면 환멸 혹은 무관심을 보일 것이다. 소문일 뿐인 이야기를 사실이나 진실로 받아들이거나, 틀림없는 진실 관계에서 나온 이야기를 근거 없는 소문으로 치부하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될 듯하다. ‘사실’이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정치인들의 목소리에 가려져 있는 ‘소문 효과’에 대한 갈망을 상상한다. 그리고 ‘소문’들 속에 가려져 있는 사실이나 진실의 얼굴을 매만지려는 시민의 의지를 상상한다. 사실과 소문의 역학 관계에서 뜻하지 않게 이득을 보았던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에게 다가올 4월은 처절하도록 잔인한 달이 되어라.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