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도 20년이 지났다. ‘9.11 사건’부터 진행 중인 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까지 많은 일이 있었다. 20세기에 중요했던 이념 문제도 공산권 해체가 본격화된 1990년 이후엔 힘을 잃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것을 ‘역사의 종말’이라고 불렀더랬다. 더불어 역사든 이념이든, 거대 서사가 결국 공갈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 덕에 그 시절 조명을 받던 포스트모더니즘도 침몰의 운명을 따랐다. 스스로 자신이 비판한 거대 서사가 되었던 탓이다. 의미를 갈망하게 마련인 인간은 살아남은 거대 서사인 시장 경제학에 더욱 매달리게 되었다. 항구를 찾지 못한 정신의 표류 탓에 이념들의 신장개업이 속속 이어졌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 자리에 도전한 경쟁자는 시장 경제학만 아니었으니, ‘신 진정성 운동’이라든지 ‘다시 모더니즘’ 따위, 모더니즘을 다시 내건 사상운동이 후계자 행세를 했더랬다.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의 반동들은 미국과 그 주변에 머문다. 모더니즘의 멋진 깃발을 펄럭이며 나타난 기함인 줄 알았더니, 저도 사실 출렁이는 물결에 이리저리 표류하는 ‘바보 배’였을 뿐이지만. ‘9.11 사건’부터 올 초 미국 의회 난입 사건까지, 그들의 깃발은 갇힌 근대의 낡음을 숨기려고 덧칠한 가짜다.

신 모더니스트들은 IT 시대의 도래와 그에 따른 문화 변동을 곱게 보지 않았다. 이들이 보수주의자를 자처하고 전통 고수의 명분을 다시 내걸며 포스트모더니즘을 공격한 이유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와 그 문화를 진부할 뿐만 아니라 공허하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문화의 사막’이라고까지 공격했다. 지나친 언사에는 뭔가 숨은 의도가 있는 법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변한 세상에 화가 난 공격자들은 사실 세상을 망친 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을 망친 죄인을 찾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속죄양이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아이러니를 전략으로 채택한 탓이 클 것이다. 스스로 진지하다고 믿는 공격자들에게 수다스러움, 비아냥거림은 참을 수 없는 소음일 뿐이었다. 의미 없음, 내용 없음, 공허함, 공격자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나르시시즘에 불과했고 인터넷과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신세대는 자폐증 환자였을 뿐이다.

지나고 보니 무엇보다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이 20년 세월을 규정한다. 과학만능주의의 발호를 막고자 애썼던 지난 세월이 허망하다 싶을 정도로 과학기술의 진공을 향해 모든 것이 광속으로 빨려든다. 지금 그들은 신경도 쓰지 않지만, 포스트모더니즘에 화가 나기는 당시 일부 과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과학기술의 자생적 철학은 시장 경제학의 모더니즘에 속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학기술과 시장 경제학이 결합한 초거대 서사의 물신 앞에 과거의 거대 서사들은 이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경배자는 동서,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불경한 자라고 꼭 사람에게 무례하지는 않지만, 사람에게 무례한 자는 어떤 신을 믿건 사실 불경의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모든 곳에서 넘치는 불안을 물신으로 잠재우려 하지만 불경한 자의 시효 지난 처방은 그저 망령의 부활쯤이니 ‘멋진 신세계’의 약속이 되지 못한다. 백약이 무효라, 출렁이는 물결에 반쯤 머리를 내밀고 간신히 숨을 뻐끔거리는 물고기 신세. 대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해주라고 등 떠밀린 인문학도 이제는 지쳤나 싶을 때, 마침 터져준 세계적 전염병은 깊이 병든 영혼의 불안한 시선을 혹시 모를 신병의 개연성으로 잠시 옮기게 해줬다. 이때 시선은 차라리 안쪽으로 향하는 편이 나았을 테지만 먹고 사는 일이 큰일이다 싶은 조바심에 영혼의 병쯤이야 자연스레 구석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쯤에서 새로운 계약이니 연대 따위 운운해 봐야 위선일 뿐이다. 매트릭스와 공생할 뿐인 시온을 약속의 땅이라 여기게 만든 오라클처럼, 불멸의 엔진을 위해 암약한 길리엄처럼. 이념으로 한껏 치장한 위선을 겪으며 얻은 교훈은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고,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것이다. 섣불리 일반화할 수 없지만 얼마나 어려운가, 타고난 성품을 고치는 일은. 그래서 옛사람들은 보통 사람의 평범함, 연못을 박차고 뛰어오른 물고기와 하늘을 맴도는 솔개,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인정을 그렇게 간곡히 이야기했나 보다. 창백한 매정에 비해 인정의 얼굴은 불그레 핏기 도는 따뜻함이다. 인정은 동정으로 고쳐 읽을 수 있지만, 이때 동정은 동냥 주는 마음이 아니라 동감이다. 동감은 너나들이 하나인 마음이지, 본디 그리고 끝내 다른 마음을 뭉치는 합심이 아니다. 뜻을 모은 동지는 더구나 아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면 인정 덕분일 것이다.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 캘리포니아의 모하비사막이다. 간다면 춘분이 지나고 며칠 뒤에 가보려고 한다. 사막의 황량함도 물론 좋겠지만 꽃밭으로 바뀐 기적을 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꽃에 취해버리지 않는다면, 잠깐 인간의 사막이 꽃밭으로 바뀐 날도 상상해 보련다.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