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내가 아직 중학생이었던 시절의 일이다. 학교에서는 학교폭력실태조사라는 명목으로 한 달에 한 번 전교생에게 설문지를 돌렸다. A4 양면으로 인쇄된 그 설문지에는 ‘금품 갈취’나 ‘신체적 폭행’ 여부를 묻는 문답이 있었고, 반 페이지 정도의 공백을 두어 자세한 사정을 쓰도록 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곳에 뭔가를 써본 적이 없었다. 눈에 띄는 괴롭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주어진 공백 안에서 사건의 맥락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애들끼리 싸울 수도 있다”거나 “괴롭힘 당한 사람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이 흔하게 사용됐다. 피해 사실이 알려지면 당사자들을 불러 ‘화해’를 시키려고 했다. 그런 분위기에서 ‘금품 갈취’나 ‘신체적 폭행’이라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폭력을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무기력한 우울감을 느끼며 텅 빈 설문지를 앞자리 친구에게 건넬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최근 스포츠계와 연예계를 중심으로 이어지는 학교폭력 논란을 보고 있으면 신기한 기분마저 든다. 교실에서는 드러나지 못했던 이야기가 폭로와 고백의 형태로 떠오르는 것도 그렇지만, 가장 놀라운 건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다. 사건에 대한 진실 공방이 있을지언정 누구 하나 학교폭력을 어린 시절의 잘못 정도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함께 분노한다. 가해자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할 뿐만 아니라 업계에서 영구 추방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학교폭력이 당사자들의 현재에도 영향을 줄 만큼 심각한 사건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도 피해자들의 고통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을 텐데 왜 사람들의 인식은 달라진 걸까? 무엇이 그들에게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도록 했을까? 학교폭력에 대한 언론보도가 늘어나며 사회적 관심이 증대했지만 획기적인 해결 방법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관련 조례나 정책의 변화에 맞춰 폭력도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었다. 피해자를 괴롭히는 방식은 오히려 더욱 교묘하고 집요해졌다.
하지만 늘어나는 관심에 힘입어 종류를 막론한 수많은 이야기가 세상에 태어났다. 영화 소설 드라마 연극 음악 그림 심지어 인터넷 게시판 등에 돌아다니는 ‘썰’까지, 피해자의 삶과 그가 겪는 고통을 주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폭로와 고백 이전에 우리 곁에 생겨난 서사가 있었다.
이야기는 극단적인 사건을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신체적 폭행이 없는 소문이나 따돌림,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 방관자들에 대한 원망, 혹은 어른이 된 후에도 남아있는 상처 등. 눈에 보이지 않았던 곳으로까지 상상력을 넓혔다.
맥락을 찾아낸 이야기는 공감을 얻고, 납작하게 짓눌려 있던 구체성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도록 도왔다. 가장 먼저 바뀐 건 사람들의 인식이었다. 여전히 학교폭력은 일어나고 있지만 그것을 과소평가하는 말들은 점차 밀려났다. 대신 어른이 된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법적인 책임을 졌다고 당사자에게 용서받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됐다. 이야기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물론 과거의 잘못으로 삶이 무너지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진정성 있는 화해의 방안도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몫일 것이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통해 희망을 본다면 그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힘이다. 외면하고 억압하고 짓누르는 힘이 아니라 뻗어나가고 다가가고 끌어올리는 힘이다. 나는 그것이 상상력이라 믿는다. A4 한 페이지의 문답으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사건의 맥락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능력이야말로 폭력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힘을 가진다.
금품 갈취나 신체적 폭행이 없다면 괴롭힘이 아닌가? 같이 술을 마셨다면 성관계에 동의한 것인가? 산업현장의 사고는 정말 작업자의 부주의 탓인가? 명확하지 않은 기준이 폭력이 되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순간마다 이야기가 절실하다. 없던 일을 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실을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10년 동안 교실의 공백을 채운 이야기를 돌아본다. 이제 학교를 벗어난 폭력을 향해 상상력을 넓혀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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