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지인이 통도사 홍매화 소식을 보내왔다. 핸드폰 화면에 연분홍 향기가 가득하다. 깡마른 가지에 세월의 더께가 터실터실한데 움을 틔우고 작은 꽃망울을 터트린 모습에 울컥한다. 신비롭다. 닫힌 문을 열고 나오는 여린 꽃망울이 경이롭다. 그들에게 어떤 힘이 있어 매년 때를 놓치지 않고 잎도 나기 전에 꽃을 피우는 것일까? 둥둥둥 대지를 깨우는 법고의 힘일까? 그 법고가 봄비를 불러와 대지를 적시기 때문일까?

“머리맡에 밀봉해둔 북채를 꺼내서//떨리는 손가락으로 무릎 꿇고 징을 치는//통도사 홍매화 몇 송이 소문보다 일찍 폈다”(옥영숙의 시조 ‘봄비 공양’)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사무칠 때 향이 더욱 짙어지는 특성이 수행자의 구도행과 닮았고 자장 스님의 지계(持戒) 정신을 표현한다”고 해서 자장매화라고 불리는 통도사 홍매화는 햇살 바람 봄비의 공양과 통도사를 찾는 많은 사람의 정성으로 올해도 화사하게 피어날 것이다.

입춘이 지났다. 산수유가 노란 부리를 내밀고 벚나무 가지 끝이 붉다. 목련 꽃눈은 보송보송한 깃털을 세운다. 2월은 나무들이 새싹을 밀어 올리는 달이다. 조금 빨리, 또는 조금 느리게 나무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가지 끝에 모아 새싹을 올리고 꽃망울을 터트린다. 그들이 빈 가지에 간직했던 꿈을 세상에 세우는 것이다.

“겨울나무 빈 가지도/그저 비어 있진 않네//가지마다 볼록볼록/새 움을 품어 안고//날마다 봄맞이 가는 길/그 꿈으로 살고 있지”(장정애의 시조 ‘길4-봄 꿈’)

어디 나무뿐이겠는가? 땅속에서도 새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 기운은 아지랑이로 피어오를 것이고 흙을 밀어 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또 새로운 생명이 바람을 털고 일어날 것이다.

이맘때쯤에는 대학 교정에도 꽃망울이 터진다. 졸업을 맞은 많은 대학생이 대학 교정을 수놓는다. 꽃다발을 가슴에 안고 학사모를 쓰고 웃음 띤 얼굴로 졸업식을 하고 삼삼오오 모여 기념사진도 찍는다. 많은 이의 축하와 격려 속에 그들의 웃음소리가 봄꽃들을 피울 것이다. 아니, 그들이 꽃망울 터트리는 봄꽃들이다. 온종일 대학교 근처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 잔칫집 같은 분위기다. 물론 우리들이 기억하는 대학교 졸업식이다. 올해는 졸업식도 비대면이라 하니 꽃 한 송이 없이 졸업할, 학사모 사진 한 장 없이 졸업할 대학생들이 그려져 안타깝다.

대학교 졸업은 초·중·고등학교의 졸업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다르다. 대부분 학창 시절의 마지막 졸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침의 의미보다는 사회인으로서의 시작의 의미가 더 강하기에 만개한 꽃이 아니라 2월에 터트리는 꽃망울을 보는 느낌이다. 그래서 더욱 격려와 응원이 필요한 졸업이다. 이제 갓 피어난 꽃망울이 사회라는 거센 바람에도 꺾이지 않도록, 꽃샘추위에도 얼지 않도록 따듯한 시선이 필요하다.

“바람이 들락거리는 헛간에 매달려서/허공에 파종한다/맨살의 마늘 몇 접/땅 한 줌 물 한 모금 없는/겨울잠이 아리다//어디 너뿐이랴, 눈물을 감추는 이/홀쭉한 몸을 데워 마지막 남은 힘/때 되면 싹을 올린다/헛발질은/없다, 없다”(정희경의 시조 ‘입춘’)

입춘쯤에는 보관해둔 마늘이며 양파며 감자에 싹이 나기 일쑤다. 아무리 보관을 잘해 두어도 물도, 흙도 없는데 싹은 단단한 껍질을 깨고 고개를 내민다. 싹이 자랄수록 그들의 몸은 점점 홀쭉해진다. 온 힘을 다하고 있으리라. 마지막 남은 힘을 쏟아붓고 있으리라. 새싹을 향한, 강인한 생명력을 향한 그들의 의지가 눈물겹다.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했다는 ‘5포 세대’를 넘어 희망과 꿈마저 포기한 ‘7포 세대’라는 말이 나온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때 되면 싹을 올리는 마늘, 양파처럼 이 땅의 청년들에게도 정녕 헛발질은 없다. 그들의 도전과 용기는 온 힘을 다해 싹을 틔우고 꽃망울 터트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홍매화에게 보내는 바람과 햇살과 봄비의 공양처럼 대학교를 졸업하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 사회와 국가는 어떤 공양으로 그들을 응원할 것인가? 그들이 겨울의 빈 가지에 차곡차곡 간직했던 꿈이 꽃으로 피어날 봄이 온다. 그들에게 정녕 헛발질은 없다.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