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경북 포항 구룡포에 다녀왔다. 부산에는 ‘없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곳은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는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인 어부 등이 많이 살았다. 지금도 그들이 살던 집이 꽤 많이 남아 있다. 최근에는 드라마(동백꽃 필 무렵) 촬영 장소로 더욱 유명해졌다. 어족 자원이 풍부한 구룡포에 일본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초반부터. 1923년 건설된 구룡포항이 동해권역 어업을 관할하는 등 동해안 최대 어업전진기지가 되자 일본인의 구룡포 유입은 더 늘어났다. 1932년에는 구룡포의 일본인이 300가구에 달했다고 한다. 포항시는 ‘일제 시기 우리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2011년 3월부터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조성 사업에 나섰다. 정비 사업을 통해 457ｍ 구간 28개 동의 건물이 보수 작업을 거쳐 보존됐다.

구룡포의 사례를 꺼낸 것은 부산항 제1부두(이하 제1부두)에 관한 얘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조성 사업 결과에 관해선 좋은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지만, ‘적산가옥’으로 치부되던, 일제의 잔재이던 일본인 가옥들을 문화유산으로 남기려는 자세를 눈여겨보고 싶은 까닭이다.

제1부두는 매축지인 돌제(해안에서 직각 방향으로 시설되는 구조물)와 잔교(해안선이 접한 육지에서 직각 또는 일정한 각도로 돌출한 접안시설)로 구성돼 1911년 3월 7일 준공됐다. 제1부두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6월 15일이다. 무역 및 철도 환승형 여객부두 기능을 할 수 있던 시점이다. 일제는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자 1905년 부산과 시모노세키를 잇는 부관연락선을 띄웠다. 그런데 당시에는 부두 접안시설이 변변치 않아 부산에 도착한 부관연락선은 항 내에 떠있어야 했다. 부산역(지금의 도시철도 1호선 중앙역 쪽)까지 철도로 연결되는 접안시설 역시 없었다. 결국, 일제는 대륙 침략과 식민지 수탈품의 수송 거점으로서 제1부두의 건설에 나섰다. 제1부두는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강제징용과 학병으로 끌려가던 곳이었고, 해방을 맞아 우리 동포가 귀국한 공간이기도 했다. 또 한국전쟁 기간 제1부두를 통해 유엔군이 입항했고 구호물자와 군수물자가 하역됐다.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는 제1부두가 있는 부산항에서 한국전쟁 중 부상당한 각 나라 군인 4981명과 6000여 명의 민간인을 치료하는 한편 우리나라 고아들을 돌보았다. 1963년부터 10년간 부산종합어시장(부산공동어시장)이 제1부두 남측에 있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태평양을 건넌 국적 화물선 고려호의 취항식이 열린 곳, 한국 최초의 원양어선 지남호의 출항식이 열린 공간 역시 제1부두였다. 한국 경제성장을 견인한 해운업과 원양수산업의 개척 정신이 깃든 곳이 제1부두다.

이러한 역사성과 장소성을 지닌 제1부두는 애초 북항재개발 사업으로 사라질 처지였다가 ‘원형 보존’ 결정으로 기사회생했다. 부산시와 부산항만공사(BPA)는 2018년 9월 제1부두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원형 보존하기로 합의했다. 앞서 문화재청은 2017년 12월 제1부두를 포함한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 8곳을 잠정 목록에 조건부 등재했다. 여기서 ‘조건부’란 피란생활상을 반영하는 유산을 추가하고 종합보존관리계획을 수립하는 것이다. 문제는 제1부두다. 하지만 현재까지 진행 중인 모양새가 심상치 않다. 시는 지난해 7월 말 BPA 측에 제1부두의 문화재 지정 추진을 위해 동의를 구했지만 ‘문화재 지정은 동의할 수 없음’이란 회신을 받았다. 지난해 12월 30일 자의 관보(해양수산부고시제2020-224호)는 그 연장선상이다. 거기에는 제1부두의 기존 건물을 고쳐 부산항기념관, 순환형 테마전시관을 만드는 것 외에도 복합문화공간을 신축하는 내용이 담겼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려면 그전에 문화재청의 잠정 목록에라도 올라야 하는데, 원형이 훼손되는 제1부두로는 사실상 어렵다.

이미 북항재개발 사업으로 제2부두와 제3부두, 중앙부두는 매립되면서 사라졌다. 제2·3 부두에 있던 돌제식 부두 경관은 북항에서 제1부두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더욱이 제1부두의 하부 구조물에는 건립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는 항만 구조물의 역사가 온전하게 녹아 있다. 단순한 ‘콘크리트 구조물’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와 함께 제1부두 건립 당시의 무역항 기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물류창고, 여객부두의 역할을 웅변하는 연안여객터미널 등 지상 시설물도 그대로 있다. 제1부두는 역사성과 장소성은 물론 부산항 북항 부두 경관의 상징적 보존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이 같은 ‘원형’을 제대로 유지해야 문화유산은 비로소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다. 원형에 손을 대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그 무엇이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길인가. 답은 정해져 있다.

편집국 부국장·걷고싶은부산·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 상임이사 inmin@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