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초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홀로 한 달 살기 위해 태국 방콕행 비행기를 탔죠. 그런데 여행 기간이 길어지면서 무료해졌습니다. 여행이 점점 일상화되고 있었죠. 그때 호텔 수영장에서 이름 모를 독일 할머니와 함께 수영하게 됐습니다.

한참 수영을 마치고 나니 할머니는 제게 대뜸 물었습니다. “너는 왜 여기 있어?” 밝은 대낮에 한가로이 수영하는 한국 청년이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죠. “어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태국 치앙마이로 떠나라고 조언했습니다. 대도시인 방콕보다 치앙마이는 자연친화적이고 조용한 도시라서, 생각 정리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이면서요.

그날 밤 저는 태국 국내선을 타고 치앙마이로 곧장 향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 말씀도 잘 안 듣는데 타국에서 만난 외국인 할머니의 말은 잘 들었네요. 어쨌든 치앙마이에서 새로운 한 달 살기가 시작됐죠. 독일 할머니의 말처럼 치앙마이는 방콕보다 공기가 좋고 조용한 도시였습니다. 신혼여행지로 꼽히는 곳이니, 아름다운 도시임에는 부정할 수 없죠.

다만, 제 눈에는 특이한 점이 들어왔습니다. 아침에 카페를 갔더니, 외국인들이 노트북을 펴놓고 무엇인가 열중하고 있었죠. 처음에는 가볍게 넘겼습니다. 그런데 다음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들의 모습에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저들은 도대체 놀러 와서 뭐 하는 걸까.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했나요. 세상 좋은 사람의 미소를 짓고 한 외국인을 잡아 물었습니다. 여기서 뭐 하냐고요. 그랬더니 그의 대답은 명료했습니다. “디지털 노마드.” 노트북 한 대만 있으면 세계 어디서나 일할 수 있는 사람을 디지털 노마드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치앙마이는 디지털 노마드의 천국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고요.

저는 머리를 아주 세게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성공을 이렇게 생각했죠. 멋진 정장을 입고요.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6시에 퇴근하는 나의 모습. 그리고 부모님과 지인에게 자랑할 만한 기업에 입사한 나의 위치. 그렇게 되기 위한 노력이 지난 학창시절과 대학생활을 지배했습니다. 성공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치앙마이에서 일하는 디지털 노마드를 보니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모습과 위치가 진짜 나의 행복인지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일하는 장소와 시간에 구속받지 않지만, 성과를 만들어내는 책임감은 뚜렷했죠. 그리고 알았습니다. 지금껏 인생의 행복 기준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맞춰져 있다는 걸요.

그래서 공무원이 하고 싶었던 청년인 제가 그동안 충분히 생각하지 못한 창업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온전히 ‘나’를 위한 인생을 설계하고 싶었죠. 하지만 인생은 실전이라고 했던가요. 의지만으로는 어려웠습니다. 우선은 제가 뭘 잘하는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명확히 알 수 없었죠. 점심 메뉴 고르기도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게다가 학교에서 어떤 기업이 좋다는 건 배웠지만,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지는 배운 적 없습니다.

그렇게 무엇을 해야 할지 찾는데,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제가 좋아하는 일과 잘하는 일을 어느 정도 찾았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시사상식을 제공하는 미디어 회사를 창업했죠. 올해는 부산진구청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됐고요. 대학교 강의 요청이 꾸준히 들어옵니다. 그러니깐 밥벌이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태국 방콕에서 만난 독일 할머니가 가끔 생각납니다. 만약, 그 할머니가 제게 치앙마이를 추천하지 않았다면 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어쩌면 남들 시선을 의식해서 더 좋은 직장을 찾아 헤매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 인생의 전환점을 준 독일 할머니를 이제 다시 만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이름과 연락처조차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기약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종식되면 다시 치앙마이에 갈 겁니다. 그때는 제 손에 여행책자가 아닌, 노트북이 들려 있겠죠.

그리고 과거의 저처럼 여행하던 누군가 제게 “뭐 하느냐”고 물어본다면 자신 있게 대답할 겁니다. “디지털 노마드!”

미스터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