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회사 근처 식당에 홀로 들어섰다. 식당 사장님의 아들로 보였던 대여섯 살 꼬마가 내 얼굴을 잠깐 빤히 보더니, 안쪽을 향해 말했다. “아빠! 할아버지 손님이 오셨어.” 순간 나는 뒤로 돌아봤다. 행여 내 뒤에 할아버지 손님이 들어서고 있었나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아무도 없었다. 그 아이는 나를 보고 ‘할아버지’라고 여긴 것이다.

내 나이 만 51세. (거의 또는 사실상) 대머리인 나는 나이가 많이 들어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지만, 이놈아…할아버지라니. 얼마 전까지 난 40대였단다. 허 참! 하느님은 어떤 큰 뜻이 있으시기에 내게 노화를 이토록 일찍 선물하신 걸까? 그렇게 허허 웃고 밥을 먹으며 식당에서 재잘재잘 놀던 그 꼬마를 보는데, 문득 깨달음(?)이 왔다. 동심. 아이가 천진한 눈과 마음으로 보고 말한 것에 무슨 거짓과 과장이 있겠나? 나는 아이의 솔직한 감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라서 충격은 덜하다.

밥을 먹고 산책하면서 동심에 관해 생각했다. 문학에서도 시인의 천진한 마음(동심)이 시와 세상을 구할 것이라고 했다. ‘어린이’를 지극히 아끼며 동심을 가꾸고 펼친 소파 방정환 선생이 생각났다. 방정환 선생이 천도교(동학)인이었고, 천도교 교주 손병희 선생의 사위였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이윽고 2대 교주로서 동학을 이끈 해월 최시형 신사(1827~1898)에게로 옮아갔다. 해월의 사상에 관해 어렴풋이 알았지만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동학 법통을 이은 천도교의 중앙총부 홈페이지에 있는 ‘해월신사법설’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그중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읽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린 자식 치지(때리지) 말고 울리지 마옵소서. 어린아이도 한울님(하늘 또는 하느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것이 곧 한울님을 치는 것이오니, 천리를 모르고 아이를 치면 그 아이가 곧 죽을 것이니 부디 집안에 큰 소리를 내지 말고 화순하기만 힘쓰옵소서.” ‘대인접물(待人接物)’ 편에서 해월은 거듭 가르친다.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고 기운이 상하느니라…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경솔히 아이를 때리면, 그 아이가 반드시 죽으리니 일체 아이를 때리지 말라.” ‘정인이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안타까움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해월 신사는 낮은 신분의 가난한 사람이었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다. 그는 19세기 조선에서 활동했다. 그런 시절에 아이를 때리는 것이 곧 한울님을 때리는 일이니 일체 그런 짓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내처 그의 사상을 담은 어록을 읽다 보니, 무시무시한 위기와 엄청난 속도의 발전이 위태롭게 공존하는 21세기에 새기고 배울 가르침이 많아 깜짝 놀라게 된다.

다시 ‘내수도문’을 본다. “가신 물이나 아무 물이나 땅에 부을 때 멀리 뿌리지 말며, 가래침을 멀리 뱉지 말며, 코를 멀리 풀지 말며, 침과 코가 땅에 떨어지거든 닦아 없이 하고, 또한 침을 멀리 뱉고, 코를 멀리 풀고, 물을 멀리 뿌리면 곧 천지부모님의 얼굴에 뱉는 것이니 부디 그리 아시고 조심하옵소서.” 지금의 코로나19 방역수칙과 똑같은 이 대목을 나는 이렇게 받아들인다. 설거지하고 남은 더러운 물이나 코, 침, 가래 같은 비말을 ‘멀리’ 뿌리면 우리는 거기서 생길 수 있는 오염과 병을 제어할 수 없다. 심지어 마당의 흙 속에 살던 미물이 죽어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 그건 천지부모님 얼굴에 뱉는 것과 같다. 부디 생태와 생명을 위해 조심하고 삼가라. 이런 통찰을 19세기에 이미 해월 선생은 펼치고 있었다.

더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어찌 홀로 사람만이 먹고 사람만이 입겠는가. 해도 역시 입고 입고 달도 역시 먹고 먹는다.”(천지부모) “내 항상 말할 때에 물건마다 한울이요 일마다 한울이라 하였나니, 만약 이 이치를 옳다고 인정한다면 모든 물건이 다 한울로써 한울을 먹는 것이 아님이 없을지니….”(이천식천) 이렇게 천지만물과 뭇생명과 사람이 이어져 있는 것(하늘이 곧 사람, 자연이 곧 사람)을 안다면 어찌 지구를 함부로 대할 것인가?

나는 여기서 종교 관점에서 천도교나 동학을 말하지 않는다. 천도교인도 아니다. 해월 최시형의 사상을 접하면서, 우리 힘으로 우리 미래를 가꿀 철학과 저력이 우리 속에 어떤 형태로든 있음을 느꼈으며 이를 직시하자는 것이다.

세계 속에서 한국의 경제지표와 경제 지위는 올라가고 있다. 하지만 선진국이란 경제력뿐 아니라 그에 걸맞은 정신·문화·철학을 갖춰야 한다는 주장은 여전히 자주 제기되며, 타당하다. 새해 초 식당에서 만난 꼬마의 ‘가르침’ 덕분에 해월 최시형 선생의 사상을 조금이나마 접하고 보니, 2021년에는 이를 더 가까이 끌어당겨 궁리하고 실천하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조봉권 선임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