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가 몰아치던 겨울 새벽이었다. 이제 다시 백수가…, 아니 프리랜서가 된 소설가 길남 씨는 간만에 들어온 청탁 원고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중이었다.

“다른 사람 글에는 이러니저러니 잘 떠들어대면서….”

요즘 그는 문학을 사랑하는 몇몇 분들의 원고를 읽고 조언을 드리는 일을 맡고 있다. 꼼꼼히 읽은 후, 이 문단에, 저 문장에 하며 두드리다 보면 원고지 15장 내외의 수필은 어느새 누더기처럼 난도질 되곤 한다. 당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길남 씨는 최선을 다하려 노력한다.

문청(文靑)들의 뜨거운 열정이 퀴리부인의 라듐 방사선처럼 쏟아지는 글을 바라보노라면 쪼그라들던 소설가의 열정도 머리를 긁적이며 튀어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그가 정작 자신의 빈 원고지를 채우려 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키보드에 올린 손은 헛돌기만 하고 모니터는 두 시간째 뽀얗고 흰 화면으로 청순미를 자랑한다. 사실 그는 자신이 글을 못 쓰는 이유를 안다. 두 손으로 받아든 고마운 청탁이지만 10여 년 오르지 않거나, 시국이 어쩌고 하며 반 토막 났거나, 소위 중앙이라고 하는 곳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원고료는 글쟁이의 의욕을 쩔꺽쩔꺽 꺾어놓기 마련이다. 안 그래도 대전업작가(大專業作家)가 되신 마당에….

심사가 틀어지니 글이고 뭐고 다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어느새 모니터에는 한글이 내려가고 드라마 영상이 흘러가는데…. 이건 뭐 하나같이 찌질하다. 드라마 주인공들도 꿈과 돈 사이에서 위태롭게 춤을 추는 중이다. ‘꿈을 좇는 주인공’조차 ‘도와주실 독지가’를 애타게 외친다. 어느덧 드라마와 물아일체가 된 소설가. 시큰거리는 눈가를 어루만지는데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린다. 시간은 새벽 3시. 딸아이가 부스스한 얼굴로 바라보며 손짓을 한다. 이크, 새벽에 볼륨이 너무 컸나? 마누라 님의 무서운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그런데 아이의 표정이 묘하다.

“아빠, 입하고 배가 이상해.”

작은 입을 오물거리는 품이 수상해서 얼른 화장실로 데려다 놓자 웩 소리와 함께 속에 있는 걸 게워놓는다. 자던 중에 속이 이상해서 엄마를 깨우다 아빠에게 달려온 모양이다. 길남 씨는 어린 딸의 대처가 기특해 연신 등을 쓰다듬는다. 아까 잠들기 전에 이마 열이 심상찮더라니 하고 후회도 한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옛 기억…. 남의 집 대문에서 환상적 점프를 시도해 뒤꿈치가 박살난 어린놈의 길남이가 나타나더니, 퇴원 도중 병원 앞 가로수에 시켜먹은 짜장면을 그대로 토해내던 남사스러운 장면이 지나간다. 그날도 추운 겨울밤이었다. 그때 내던진 목발을 주워들고는 등을 두드려주던 어머니, 어머니…. 그때 그 어린놈은 이제 아비가 되어 딸의 등을 두드려준다.

새벽 4시가 다 되도록 닦고 씻기고 입히고 재운 후에야 컴퓨터 앞에 다시 앉은 소설가 길남 씨. 마우스를 움직이자 오늘 피드백했던 문청들의 글이 나타난다. 갑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사나이.

아아, 부끄럽도다! 글을 써야 한다는 사명감에 밤을 새워 소설을 쓰던 문청 길남이는 어디로 갔더냐? 아이의 등을 두드려주는 아비가 됐듯이, 문청 시절을 지나 이제 문청들의 글을 다듬어 주는 소설가가 되었건만 그의 곁에는 욕심과 나태만 덕지덕지 붙어있을 따름이다. 원고의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투쟁은 분명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핑계로 써야 할 사명마저 잊고 있던 것은 아닐까?

새해 1월 1일 자 신문에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영광의 얼굴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꿈을 위해 열정을 불태웠을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의 한숨도 함께 존재한다. 길남 씨도 한때는 그런 지망생 중 싹수가 노란 한 명이었지 않았던가? 지금의 처지는 그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말이다. 그는 다시 한번 반성하며 고개를 숙인다.

이렇게나 이상하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려 용감하게 나섰던 문청들에게 박수를…. 그리고 지금이라도 정신을 조금 차린 소설가에게 따끔한 회초리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