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화폐는 서로 많이 닮은 것 같다. 먼저 화폐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인간에게 화폐는 어떤 존재인가? 정작 자신은 숫자와 그림 몇 개 그려진, 얼마든지 복제가 가능한 ‘싸구려’ 종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녀석은 부지런하기도 하다. 사람들 사이를 바쁘게 오고 간다. 세계화 바람을 타고 ‘몸’을 바꿔가며 온 세상 사람들 사이를 거침없이 오고 간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공간여행’ 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컨대 ‘현재의 나’가 빚을 내어 공부하는 것은 ‘미래의 나’를 위한 것 아니겠는가? 이 녀석은 나의 현재와 미래 사이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사람들의 현재와 미래 사이를 넘나든다. 이렇게 화폐는 시공간을 넘나들며 쉴 틈도 없이 돌고 또 돈다.
여기서 화폐의 마법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화폐에 각자의 욕구를 담아 서로 교환하고 연결했을 뿐이었다. 그랬더니 소비가 늘어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소득이 올라가니 소비가 더 늘어나 더 많은 만족과 이익을 가져다 주었다. 이런 화폐의 마법은 더욱 진화하여 사람들의 능력을 평가하고 사회적 지위를 결정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간과 사물의 존재가치를 평가하는 ‘절대단위’가 되었다. 화폐는 ‘존재의 집’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화폐가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 가짜화폐를 뿌리거나, 누군가 화폐를 가두고 흐름을 조작하거나, 정부가 화폐량을 임의로 조정하여 가치를 왜곡하거나, 코로나19처럼 화폐의 흐름을 막는 일이 벌어지면 말이다. 그러면 외환위기 때처럼 화폐의 마법은 스러지고 우리는 홈리스처럼 길거리를 배회할 것이다.
언어도 화폐처럼 시공간을 넘나들며 온 세상을 돌고 또 돈다. 다만 사람들이 언어에 각자의 사유와 정서를 담아 소통하고 연결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여기서 언어의 마법이 시작된다. 언어는 자연과 인간을 객관적 대상으로 인식하여 모든 현상을 깊이 이해하도록 한다. 이런 언어는 더 나아가 깊은 사유를 통해 진실과 진리를 향하고, 따스한 정서를 반영하고 공감력을 길러내어 평안을 지향한다. 이 과정에서 자연과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외형적이든 내면적이든, 우리가 인식하는 세상의 모든 현상을 ‘의미’로 드러내어 존재가치를 부여한다. 이제 언어는 세상 존재 자체를 ‘의미’로 드러내 공존을 꿈꾸는 ‘존재의 집’이 되었다.
이런 언어가 ‘타락’하면 어떻게 될까? 언어는 어떤 현상에 대해 무지할 때, 사실을 인지했으나 자신의 의도대로 왜곡 또는 조작할 때, 사실을 바탕으로 인과관계 없이 악의적으로 해석할 때 타락한다. 이럴 때 언어의 마법은 사라지고, 유신시대와 5공시대처럼 우리는 뒷골목의 어딘가 호각 소리와 문 두드리는 소리에 가슴 조이고,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와 끌려가던 벗들의 피 묻은 얼굴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힘없는 노여움으로 치를 떨어야 한다. 이런 고통스럽고 아픈 기나긴 언어의 타락시대를 우리는 민주화운동으로 버텨왔다. 1987년 6월 항쟁은 ‘타는 목마름으로’ 갈망했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출구를 열었고, 이 열린 공간 속에서 존재들의 의미를 되살리는 언어의 복귀를 위한 디딤돌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잊혀진 언어의 마법은 생동감 있게 다시 작동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그 열린 공간에서 언어의 타락이 진화하는 역설을 경험하고 있다. 2020년 세계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언론은 42위로 아시아 최고 수준이지만 한국 언론신뢰도는 조사 대상 주요 40개국 가운데 최하위 수준이다. 이것은 자유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얼마나 언론이 언어 타락를 주도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차이라면 과거에는 권력자에 굴종하면서, 현재는 자신이 권력자가 되어 타락을 선도한다는 것이다. 미디어 매체의 발달로 특정 개인과 집단도 이런 흐름에 가세하고 있다. 주장과 추측을 사실로 포장하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악의적 해석이 덧붙여진 언어들이 온갖 매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다.
자유공간을 비집고 들어와 가짜언어가 진짜 행세하는 시대에 맞서 우리의 ‘존재의 집’을 지켜내는 ‘언어 민주화운동’이 절실한 시대가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 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그에게로 가서/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새해부터는 이런 언어들 속에서 살고 싶다.
유일선 한국해양대 국제무역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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