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두 차례에 걸친 국민 통합의 체험이 있다. 최저빈곤에서 막 벗어나 뭘 해도 일이 되는, 대졸자가 여러 통의 입사 허가를 받아놓고 회사를 고르던 1970년대 전반기 무렵이 처음이다. 혹자는 그 당시를 군부독재에 신음하던 암흑기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중동 건설현장의 송금을 포함해 수출입국으로 온 사회가 신명 나 있었던 것이 사실에 가깝다. 먼 훗날 집권하는 김영삼, 김대중의 신민당을 그때까지는 집권 대안으로 여기지 않았다. 국가의 주요 자원을 공화당이 과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통합기는 1980년대를 점철한 민주화 운동기다. 전두환의 민정당에 투표했음 직한 가게와 약국에서도,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도 시위하는 학생, 노동자들을 감춰주고 먹을 것을 건넸다. 대세란 정말로 놀라운 것이어서 너나없이 민주화에 공감하며 하나 된 모습을 보였다. 특히나 지금은 보수언론이라 지칭되는 신문사들도 행간에 의미를 숨겨가며 각종 사회투쟁을 전하려 애썼던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 직선제로 귀착된 1987년 민주화 조치 이후의 초기 정권들은 적대 세력을 품음으로써 권력 안정을 꾀했다. 노태우, 김영삼의 합당은 상식을 뛰어넘은 발상이었고, 그 정치력은 김대중까지 이어졌다. 김종필과의 연대 및 박정희 업적 수용이 없었다면 김대중의 파격적인 남북관계 연성화와 IT혁명은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이후 노무현 시기부터는 오롯이 자기 기반의 독자 집권이 이어졌고 마치 대통령직이 고난의 가시밭길인 양 온 사회가 진영대립으로 요동치는 형국이 됐다. 모든 정권 말이 힘들었지만 노무현 시기부터는 집권기 전체가 상대편의 무한반대로 점철됐다. 이명박, 박근혜 시기는 물론 현 문재인 대통령조차 단 한 차례도 상대편과 협조적 관계를 이끌어 낼 수 없었다.

다시 또 한국의 고질병, 대통령 임기 말의 권력 누수가 시작됐다. 검찰총장을 징계하려는 대통령의 정치적 결단을 법원이 무산시키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앞으로 대통령은 법원의 허락을 받아가며 집무해야 한다는 말인가. 가령 북한 또는 중국, 일본과 어떤 극적인 합의를 이루더라도 국회 논의 이전에 극렬 탈북단체나 극우세력이 직권남용 운운의 송사를 걸면 또 법원의 판단만 기다려야 하는 사태가 빚어질지 모른다.

경제 정책도, 국토전략도, 심지어 인사권 조차도. 과장된 염려라 할지 모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예컨대 탈원전이라는 국정방향을 검찰총장이 못 마땅하게 여긴다면 해당 기관을 수십 차례 압수수색하여 온갖 기사 감을 만들어 여론을 휘두를 수 있다. 혹시 지엽적인 비위사실이라도 걸리면 법원이 등장하여 국가사업 자체를 무산시킬 수도 있다. 기소를 할지 판결 대상으로 삼을지 모두 그들의 재량이니까.

현재 집권층과 그 반대세력은 온갖 사안에서 적법과 불법이라는 법률 언어로 싸우고 있다. 적법은 공정과 정의의 옷을 입고, 불법은 그 반대가 된다. 희한한 일이다. 실제 세상 일이 법전에 기록되어 있는가. 실상 법률적 판단이란 검사와 판사의 자의적 해석과 재량에 맡겨져 있다. 이른바 법기술을 부린다면 실제 불법성 이전에 절차 문제를 한없이 따지고 들어 국가행정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 사회적 기준선으로 법치를 운용하는 것이야 온당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정치적 판단의 영역까지 검사, 판사들이 개입하고 결정한다면 도대체 선거는 무슨 의미를 갖는가. 국민주권이 아니라 검사 판사가 최종 권력자로 통치하는 사태 아닌가.

대통령과 민주당에게 여론 지형이 몹시 나쁘다. 앞으로 좋아질 조짐도 없다. 4번의 선거를 연승하여 가질 수 있는 수단은 다 가졌다. 그런데 과연 문재인 정부가 부패했는가. 이념적으로 과잉 편향됐는가. 특별히 정책적 실수가 많았는가. 오만했던가. 감히 말하건대 전부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보다는 중립지대의 여론이 등을 돌리고 있는 현상으로 읽힌다. 왜 그런가. 무력해 보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임명한 검찰총장이 벌이는 어깃장에 무려 2년 가까이 끌려 다니며 발목 잡히는 모습에 지쳤기 때문이다. 합법성을 빙자한 기득권의 법기술을 뛰어넘을 정치력과 리더십. 그런 기대는 불가한가.

시인·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