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 선종의 부활을 이끈 경허(1849~1912) 대선사 일대기를 다룬 최인호 작 장편소설 ‘길 없는 길’에 조선 말기 전염병 공포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 나온다. 9세 때 한양 근처 청계사에서 출가한 경허는 13세 때 계룡산 동학사로 옮겨 불교경론을 배웠으며 22세 때 동학사 강원의 강사가 된다. 서른이던 1879년 옛 스승인 계허 스님을 뵈러 청계사로 가던 도중 한 마을에서 ‘생지옥’을 목격한다. 돌림병이 유행해 집집마다 문을 닫아 걸었고, 민중들은 정부의 그 어떤 의료보호도 받지 못했다. 부모가 역병에 걸리면 아들이 지개에 지고 가서 동구밖 구덩이에 산채로 던져야 했다. 아비규환인 속가(俗家)의 풍경을 보면서 경허는 불현듯 생사불이(生死不二)가 경전 속에 있지 않음을 깨닫고 그 길로 발길을 돌려 곧장 용맹정진에 든다.

이 이야기에서 보듯,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백성의 목숨을 가장 많이 빼앗아 간 것은 전염병이다. 장티푸스, 천연두, 콜레라가 3대 전염병이었다. 부산대 한문학과 강명관 교수가 쓴 ‘조선의 뒷골목 풍경(푸른역사·2003년)’에 관련 내용이 보인다. 정조 23년 한 해 전염병 사망자가 12만8000명에 달했다. 남인의 영수 채제공과 노론의 영수 김종수 등 정치권 거목들도 맥없이 쓰러졌다. 1859년과 1860년에는 콜레라가 유행했는데, 전국서 40만 명이 숨졌다. 공공의료가 부실했던 이 시절엔 전염병이 덮치면 속수무책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병마와 싸워 수많은 민초들의 목숨을 살려낸 이름 없는 민간 의원들이 있었다. 강 교수는 이들을 일컬어 의술의 참된 정신을 실천한 ‘민중의(民衆醫)’라고 부른다. 정조실록(16년)에 따르면 전염병이 유행했을 때 황해도 재령의 김경엽이 가난한 사람을 1000명 넘게 치료해 준 공로로 특별 표창을 받기도 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21세기 최대 전염병이 지구촌을 덮친 올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 독자들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2020 Person of the Year)에 ‘이름 없는 의료 종사자들’이 뽑혔다는 소식이 10일 전해졌다. 그러면서 타임 지는 “의사와 간호사 구급차 운전자, 배달종업원, 식료품점 종업원에 이르기까지 바이러스와의 전쟁 최일선을 지킨 모든 이름모를 사람들이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고 전했다. 국제신문도 10일 자 1면 메인 포토뉴스로 격무 속에서 잠시 짬을 내 온열기를 쬐고 있는 부산 연제구보건소 의료진의 모습을 담았다.

‘우리시대 민중의들’의 희생과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

이승렬 논설위원 bungs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