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시든 것처럼, 올해도 끝나고 있다. 지나가는 해를 돌아보고 새해 포부와 희망을 생각해볼 즈음이지만 현대사에 유례없는 역병으로 시작해 끝을 맺게 되었으니 어떻게 지냈나 싶은 것이, 억지로 졸음을 참아가며 선 새벽 불침번처럼 멍하다. 모든 것을 삼킨 심연, 먼 나라 전쟁까지 잠시나마 멈추게 만든 역병이라 할지라도 계절이 변화를 멈추지 않듯 인생도 따라 멈추지는 않았으려니와 새해도 백지 같은 공백일 수 없겠다.

중세처럼 모든 곳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역병이 자연 소멸할 때까지 몇 해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의학이 발달한 덕분에 양약 개발의 반가운 소식도 속속 들리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물론 역병이 길게 이어지리라는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일상이 회복되기만 막연히 기다리기도 지치면서 여기저기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고 몸부림도 거세지기 시작한다. 시룻번 틈으로 뿜어져 나오는 김에서 시루 속 들끓는 에너지를 짐작하듯, 어느 나라 가리지 않고 억누름도 한계에 도달했다는 소리일 테다.

최근 들어 국가의 통제가 도를 넘었다며 저항하는 유럽의 시위 소식이 이에 직접 해당할 테지만 그들의 시민 의식을 생각하면 새삼스럽지 않다. 열기로만 따지자면 유럽보다야 미국, 특히 대통령 선거전이 올해 으뜸이지 싶다. 다들 끝났다고 생각해도, 그는 아직 아니라고 손사래 치고 있지만 말이다. 결과는 아마 그도 예상했을 게다. 비록 투표하기 전에 예고한 바도 있지만, 선거 이후 그대로 행동으로 옮긴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남의 나라 일이라 재미있게도 생각했다. 그를 재미있게 생각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선거 운동이 한창일 때 그 언행, 열성 공화당원 다루는 그 솜씨가 문화대혁명 때 마오쩌둥이 홍위병 다루는 솜씨 뺨친다 싶었던 적이 있는 탓이다.

불만이 있더라도 원만한 이행을 보여주려고 애쓴 전례를 깬 그는 선거 결과 불복 제소도 마다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고집처럼 보여도 역병이 만연한 비정상 예외상태 속에 다시 예외 상태를 만들어내는 전략가의 노련함이다. 이 또한 지구전으로 중국을 석권한 마오쩌둥의 게릴라전 전략과 다르지 않다. 풍토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도 어쩌면 인간에겐 공통되는 유형이 있는가 싶기도 하고, 전략이란 동서양 구분 없이 한 길인가 싶기도 하다. 인간적 풍모와 구사하는 전략을 볼 때 미국이 아니었다면 그는 본래 독재자가 될 재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여부야 확인할 길 없어도, 중국 측이 ‘미국의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중국의 그’를 떠올리게 하는 탓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치는 신사의 스포츠라는 빅토리아시대의 정치관을 조금이라도 믿는 사람이라면 공정 경쟁과 뒤끝 없는 승복의 기준에 비춰 그의 소행이 몹시 몰염치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그의 특이한 인물 됨됨이나 상업계 출신이라는 배경을 탓할 수만 없다. 오늘날 사태의 기원은 외국 테러리스트가 미국을 직접 공격한 9·11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은 ‘전 지구적 내전’이 국내까지 파고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고 그래서 만든 것이 ‘애국법’이다. 미국은 이를 근거로 테러와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무분별한 남용으로 시민의 자유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 법은 2015년 폐지되었어도 잔상은 오래 갔다. 올해 선거일 전후 심지어 내전 가능성 소문까지 퍼지며 민심이 흉흉했던 이유는 언론 보도가 빈말이라 하더라도 시민은 그것을 허구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실일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이다. 비정상적인 예외 상태가 도래할 수 있다는 믿음 말이다.

전 지구적 내전, 곧 예외 상태가 상례가 되는 일에서 우리도 자유롭지 않은 형편이다. 더구나 몇 차례나 헌정 중단 사태를 겪으며 예외 상태가 정상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하지 못하고 나비의 꿈처럼 오락가락하는 지경으로 살아온 우리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정상화된 뒤로 과거사를 비난할 때나 썼지, 듣기도 싫고 하기도 싫던 말이 ‘독재’다. 요즘 정치권을 발원지로 부쩍 자주 들리길래 이리저리 견줘보니 그저 입으로만, 정치적 수사법으로만 쓰는 경우가 많았지만, 비유를 비유로 알아듣지 못하고 사실로 여기는 사람도 꽤 많지 싶었다.

독재 소리를 자주 입에 담는 치들은 예외상태가 상례가 되는 데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심리가 내재해 있지 싶다. 그리고 독재 소리는 입에 담기 꺼리는 사람이라도 ‘뉴 노멀’은 별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 뉴 노멀을 용인하는 심리도 독재를 입에 담는 심리와 멀지 않아 보인다. 본래 어떤 외국 경제인이 처음 사용했다는 이 말도 예외상태가 상례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얼마나 더 노력해야 예외는 예외로 남고 상례는 상례인 채 머물게 될지, 참.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