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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터치] 길은 하나였었다 /배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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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20-11-23 19:23:54
  •  |  본지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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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청명하기 그지없던 날이었다. 살짝 불어오는 바람이 기분 좋게 스치며 낙엽을 우수수 데려가는…. 소설가 길남 씨는 가을의 정취를 물씬 느끼며 아내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외쳤다.

“아니, 니 힘든 건 알겠는데 꼭 이래 속을 디비야 되나? 어! 그래, 다 때리 치아뿌라!”

아아, 길남 씨는 요즘 무척이나 괴롭다. 대사증후군으로 맛이 가서 난생처음 소설 청탁마저 펑크 낸 상태. 거기에다 코로나19의 칼바람은 모두에게 그러하듯 그에게도 불어 닥쳤었다. 긴급재난문자보다 더 무서운 강의와 행사 취소문자가 줄줄이 들어오고, 생계를 위해 나섰던 마트 족발 코너는 돼지열병으로 휘청거려 언제 모가지가 뎅겅 할지 장담하지 못한다. 이 와중에 집 베란다 5m 전방에서는 30층을 올린다느니 40층을 올린다느니 공사판 두 곳이 아침을 드르륵 쾅쾅 밝혀주고, 길 건너 아파트는 5억이 올랐느니 누구는 이사 가고 2주 만에 2억이 뛰었다느니….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문들은 남아있는 의욕마저 와그작 와그작 씹어먹는 형편이다.

현재 길남 씨가 서있는 곳은 부산 시청 건너편의 망미동 방면 연수로. 낭만적 대사를 100데시벨로 지른 뒤라 행인 수십 명이 그를 주목하고 있다. 스트레스에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고 싶지만 일단 도망치듯 가을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래, 대사증후군에는 걷기가 최고지….”

부산을 사랑하는 소설가는 고즈넉한 연수로의 산책으로 애써 감정을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5분도 안돼서 울려오는 드르륵 쾅쾅 공사소리! 이 동네는 또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나…? 황령산 물만골로 오르던 길도, 금련산 마하사로 오르던 길도 그의 향기로운 추억은 모조리 몇 십층 아파트로 가로막혀 있다. 길남 씨의 혈압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다.

지난해 부동산 조정대상지역에서 풀려난 부산의 땅과 집, 건물은 이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고 있다. 사람의 향기가 나는 재개발은 사라지고 돈 냄새 풀풀 나는 대단지 아파트만 우후죽순 들어설 뿐…. 아내도 몇 푼 안 되는 영수증으로 끙끙거리다 몇몇 지인들의 집값이 몇억씩 올랐단 소식에 상대적 박탈감이 들었을 것이었다. 그 짜증이 그대로 길남 씨에게 꽂혔을 것이고…. 이놈의 미친 부동산이 가정의 평화마저 박살내는구나! 하며 몸을 떨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건다.

“저…, 저키요. 수, 수집상회가 어디 있써요?”

대뜸 휴대폰의 위치찾기 앱을 들이미는 그는 살 빠진 길남 씨보다 30㎏은 더 야위어 보이는 동남아 계열의 외국인 남자. 처음엔 ‘도를 아십니까?’쯤으로 여기고 인상을 쓰던 길남 씨는 엉뚱한 곳에 버려져 있는 외국인을 돕기로 한다.

“아따, 거 참. 저기요, 여기서 앞으로 직진! 버스타고 다섯 정거장. 걸어서는 30분! 멀어요, 멀어. 그러니까 버스정류장이….”

“아, 걸어서 30분! 괜찮아요, 캄사합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외국인은 앞을 향해 힘차게 걸어 나간다. 그런데 난감하다. 걸어가는 방향이 같다보니 신호등만 만나면 둘은 다시 재회하고 만다. 최대한 발걸음을 늦추어도 둘만의 술래잡기는 쉴 새 없이 이어진다. 서로 눈이라도 마주친다면 그 어색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발걸음을 늦추기 위해 대로변에서 벗어나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길남 씨. 그 덕분에 연수로 산책은 뜻밖의 성과를 얻는다. 공사판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연수로의 고즈넉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길남 씨의 울분은 어느새 사라지고 가을날의 정취가 그를 감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수영로 부근까지 걸어왔다. 아차, 외국인 남자는? 손을 이마에 대고 살펴보니 100m 전방에서 ‘씩씩 군’이 목적지를 못 찾고 또 헤매고 있는 중이다. 길남 씨는 서둘러 걸어가 늠름하게 길을 안내한다.

“바로 저 앞에 간판 보이지요? 저기가 거기네.”

“아, 네에! 정말 캄사합니다!”

씩씩 군과 헤어지고 잠시 길가에 선 길남 씨. 그는 방금 걸어온 연수로를 다시 한번 바라본다. 문득 거창한 깨달음은 아니지만 작은 무언가가 “그래, 길은 어차피 하나였었어.”하고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길남 씨는 그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하늘을 한 번 쳐다본다. 청명한 하늘…. 그의 발이 뒤를 돌아 다시 휘적휘적 걷기 시작한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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