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내건 대선 슬로건은 ‘미국의 정신을 위한 투쟁’(The Battle for Soul of Nation)이었다. 미국 우선주의를 고수하며 ‘미국을 계속 위대하게’(Keep America Great)를 외친 도널드 트럼프에 맞서 치유와 화합을 강조했다. 지난 7일(현지시간) 바이든 당선인은 승리 연설에서도 “분열이 아닌 단합을 추구하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미국이 세계로부터 다시 존경받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대선 개표 5일째에야 이뤄진 일이다. 그것도 트럼프가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소송으로 대응하겠다고 버티는 와중이다. 백악관 주변에서 “넌 해고야!”를 외치며 트럼프 낙선을 반기는 것이 표심이라지만, 끝을 알 수 없는 불복 소송의 시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바이든으로선 대선 3수 끝에 권력을 쥔 각고의 시간만큼이나 내년 1월 취임식까지의 시간이 중요하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말이 떠오른 이유다. 소설가 박완서가 ‘아주 오래된 농담’이란 작품에서 사용했다. 프랑스 사람은 해가 지고 사물의 윤곽이 흐려질 무렵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한다. 집에서 기르는 친숙한 개가 늑대처럼 낯설어 보이는 섬뜩한 시간이라는 속뜻을 강조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 소설은 40대 가장을 내세워 가족의 허울을 시원하게 까발렸다. 가족이란 말이 주는 따뜻함과 위로의 이면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책무와 가족을 꾸려가기 위한 수고로움과 구차함이 공존한다. 단란한 중산층 가정을 들여다 보니 곳곳이 지뢰밭이다. 그러니 개와 늑대의 시간은 희망의 등불이자 위험의 경고등이다.

트럼프는 이번 선거에서 4년 전보다 오히려 더 많은 표를 얻었고, 함께 치러진 상원과 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 선전에 기여했다. 그럼에도 1992년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에 이어 28년 만에 재선에 패한 현직 대통령이란 멍에를 썼다. 1789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이후 231년간 백악관 주인이 된 45명 중 11번째 사례다. 이것만으로 “선거가 끝나지 않았다”며 반발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대권 승복은 미국이 자랑하는 전통 가운데 하나다. 트럼프 자신도 2016년 힐러리 클린턴 후보로부터 당선 축하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1896년 대선 이래 이어져온 이 전통도 바람 앞에 촛불이다. 트럼프가 여전히 재검표와 무효 소송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엔 4년 전 ‘정치권 아웃사이더’인 트럼프가 일으켰던, 그리고 바이든과 초박빙 승부를 펼쳤던 트럼피즘(트럼프식 정치)이 있다. 미국 우선, 경제 우선의 분열과 이단 정치 밑바탕에 트럼프가 4년 전 투표장으로 끌어들인 저소득층 저학력층 백인 남성이 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경제적 사회적 소외층인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트럼프가 목청껏 외쳤다. 흑인보다, 중남미에서 건너온 불법 이민보다 못한 당신들에게 일자리를 주겠다며. 트럼프를 지지하는 층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하층 백인이 기여한 것은 사실이며, 이젠 엄연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지난해 4월 나온 ‘알려지지 않은 미국 400년 계급사’는 하층 백인을 다룬 책이다. 원제가 ‘백인 쓰레기’(White Trash)인 이 책에서 저자인 낸시 아이젠버그 루이지애나주립대 석좌교수는 가난한 백인에 주목했다. 이들은 신대륙 개척시대부터 존재했으며 현재도 레드넥(Redneck), 백인 쓰레기, 트레일러 쓰레기, 백인 깜둥이 등으로 불리며 멸시와 천대를 견뎌왔다. 1960년대 이후 흑인이나 히스패닉, 여성 등 소수자를 위한 제도적 배려에서도 비껴난 부류다. 기회의 땅, ‘아메리카 드림’의 짙은 그늘인 이들이야말로 트럼프가 2024년 대선을 염두에 둔다면 든든한 지원군이라고 여길지 모를 일이다.

트럼프의 불복에도 불구하고 바이든은 정권 인수 절차를 밟고 있다. 치열한 선거전과 피말리는 개표 과정이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면 지금은 온전히 바이든의 시간이다. 황혼의 불투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빛을 만들어야 할 때이다. 바이든은 코로나19 확산 사태를 억누르면서 침체에 빠진 경제를 살리고, 동맹과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등 트럼프 지우기에 많은 공을 들이겠지만 진정 미국이 존경받는 나라로 거듭나려면 이같은 하층 백인 문제가 발등의 불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을 위한 제도적 배려에 나서 존경 받는 미국의 시간을 만들어주기 바란다. 상원의원 6선 36년과 부통령 2선 8년을 거친 77세 노익장의 경륜을 기대한다.

개와 늑대의 시간을 우리말로 하면 ‘이내’다. ‘해 질 무렵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이다. 한반도 평화와 경제 활성화에 미국의 역할이 크다. 바이든이 국내와 대외 정책에서 새 판을 짜는 만큼 그에 걸맞은 대응책을 마련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수석논설위원 jsdo@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