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모의고사를 치르는 중이라 교실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문득 아무도 없는 산정(山頂)에 홀로 서 있는 듯한 휑한 느낌이 들었다. 문제를 풀고 답안지를 메우는 것이 갑자기 무의미해졌다. 백지를 냈던 그달 성적은 바닥 근처로 떨어졌다. 어쩌다 객기로 시험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라지만, 왜 이런 과목을 배우고 이런 방식의 시험을 거쳐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날 백지를 낸 것은 무의미한 공부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었을 것이다.
나는 학교 공부가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학교는 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오가는 길에 늘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과목들은 누가, 어떤 의도로 그렇게 구성한 것일까? 또 교과목 사이 위계(位階)는 왜 그렇게 만들어졌을까? 이 과목들이 나의 삶에 그렇게 절실한 것인가? 입학할 때 나에게 혹은 나의 부모에게, 학교는 무엇을, 왜, 어떻게 가르치는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교과서를 사 오라 해서 사 가지고 갔고, 교실에 앉아 교사가 가르치는 것을 그냥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납득할 만한 어떤 설명도 듣지 못하고, 한 토막 정보도 제공받지 못한 채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붙들려 낯선 땅에 유폐된 오갈 데 없는 수인(囚人) 신세였다. 이렇게 공부와 성적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생각이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당연히 수업은 재미가 없었다. 아니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자연과 사회의 이치를, 윤리를, 직업 선택의 근거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는 과정이 아니라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한 요령을 익히는 과정에 가까웠다. 달리 말하자면 시험은 학생이 알고 있는지 테스트하여 그를 보다 완전한 앎의 세계로 인도하는 과정이 아니라, 수치로 환산된 성적을 내고 그것으로 학생들의 서열을 정하는 장치일 뿐이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꼭 한국 근대교육만의 문제는 아니다. 정약용은 ‘오학론(五學論)’에서 과거학(科擧學)을 맹렬히 비판했다. 조선 시대 과거는 국가 관료를 뽑는 시험이다. 과거학은 따라서 당연히 시험공부를 뜻한다. 그런데 그 시험은 어떤 시험이었던가. 당연히 한문(漢文)으로 쓰는 작문 시험이었다. 희한한 것은 과거에 쓰이는 한문은 보통 양반들이 일상에서 쓰는 한문과는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로지 과거 시험에만 쓰이는 것이었다. 과문(科文) 또는 공령문(功令文)이라 부르는 그 과거 시험용 한문은 과거에 합격하고 나면, 혹은 과거를 그만하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것이었다.
보통의 한시, 보통의 편지글, 보통의 제문, 보통의 기문(記文), 보통의 상소문 등 양반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작문을 하는 데 과문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과문이 자연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인간의 윤리적 삶에, 농업과 수공업과 같은 실용지식을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되었는가? 전혀 아니었다. 오직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조선의 양반들은 이 무의미한 과문 공부에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다산이 과거학을 저주에 가깝도록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그리고 많은 사람이 경험했거나 지금도 경험하고 있을 교육의 무의미함은 정약용이 맹렬히 비판했던 과문의 무의미함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무의미한 과문 공부에 탁월한 능력을 보인 사람을 ‘장원급제’로 높이 평가했던 그 풍조가 지금은 ‘전교일등’ 혹은 ‘무슨 법대’ ‘무슨 의대’를 높이 평가하는 풍조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 공부 잘하는 사람을 애써 폄하하려는 것처럼 들리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학교교육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나만의 편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잘했거나, 잘하는 사람은 당연히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공부 잘함’에는 개인 노력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든 분야에서 성실하게 노력한 사람이 존중받아야 하는 것만큼 존중받아야 할 뿐이다. 덧붙이자면, ‘전교 1등’을 내세우거나 공부 잘했노라고 떠벌리며 남더러 공부 못한 사람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처럼 한심한 사람도 없다. 무의미한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인성이 삐뚤어진 사람이 아닌가 한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