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이란 말을 처음 본 건 동네 보습학원에 내걸린 광고 현수막이었던 것 같다. 국어를 가르치는 곳이었는데, 그때는 대학입시의 논술 시험 비중이 꽤 큰가 보다 짐작만 하고 말았다. 스쳤을 뿐인 신조어가 끈 떨어진 연 나뭇가지에 걸리듯 마음에 걸린다. 이런 문해력, 저런 문해력 따위를 학교 바깥에서도 자주 듣는 탓이다.
보습학원 현수막의 뜻은 문장 해득 능력, 공부와 관련된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수리 문해력, 통계 문해력, 정보 문해력, 디지털 문해력, 미디어 문해력, 예술 문해력, 생태 문해력, 재난 문해력, 건강 문해력 같은 학교 바깥 용례는 다르다. 수리, 통계, 정보야 얼핏 고개를 주억거릴 만하지만 생태, 재난, 건강은 학교 과목처럼 보이지 않으니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문해력은 그저 이해력을 대체한 새 말일 뿐인가.
문해력은 리터러시(literacy)의 번역어다. 국어사전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라 일러준다. 읽고 이해한다면 독해력이란 말이 이미 있지 않은가? 새 말이 왜 필요하지? 한자말이라 혹시 하는 마음에 중국과 일본 사전을 뒤져보았다. 중국에서는 문본 해독력, 곧 텍스트 독해력이라 쓰고 있었고, 일본에서는 예전처럼 독해력이라 하거나 저들이 곧잘 하는 대로 ‘리테라시’라는 비슷한 소리로 옮겨 쓰는 형편이었다. 하여튼 문해력이 국산 한자말이라는 사실만 확인한 셈이다.
문해력을 이렇게 자주 쓰게 된 계기는 ‘모두를 위한 교육’이란 유네스코의 2006년 보고서이지 싶다. 보고서는 리터러시를 ‘다양한 인쇄물 및 서면 자료를 사용하여 식별, 이해, 해석, 생성, 의사소통 및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규정했다. 잠깐, 인쇄물과 서면자료라고? 책, 신문, 프린터 출력물 같은 것? 그러면 문해력 이전에 독해력이나 식자라고 부르던 것과 뭐가 다르지? 그런데 내 사진과 글과 영상은 지금 종이가 아니라 하드디스크에, 아니 어느 클라우드에 있는걸. 웬일인지 종이라는 매체에 얽매인 이 보고서는 우리 시대를 조화롭게 설명하는 데 실패한 인상이다.
IT 시대는 종이에서 마이크로칩으로 매체만 바꾸는 것, 펜이나 잉크병, 붓이나 벼루를 책상에서 치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통신망으로 연결된 컴퓨터를 능숙하게 조작하는 기술을 익혔는데, 계속 추가되는 갖가지 디지털 기기 조작 기술까지 배우라는 끊임없는 요구도 받는 형편 아닌가. IT 시대의 요구는 사회를 바꿀 뿐 아니라 인간의 몸과 마음까지 바꾸고, 아예 인간 자체를 다시 만든다. 그렇게 IT 시대가 요구하는 문해력은 일정한 교육 없이는 터득할 수 없는 후천적 기술, 터득해야 먹고 살고 그렇지 못하면 살지 못하는 일종의 자격증이 된다. 어떠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가질 수 있는, 사람의 선천적 능력인 이해력과 문해력은 그래서 다르다.
IT 시대의 본격적 도래는 비교적 최근이지만 실험과 시도는 훨씬 전부터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급진이라고 말해야만 할 1960년대부터일 것이다. 진공관도 아직 널리 쓰던 시대, 마셜 맥루언은 하늘의 인공위성 몇 대를 보고 통신망으로 촘촘히 연결된 ‘지구촌’을 내다봤다. 탈문자 사회 또는 문자 이후의 사회가 오리라는 선견지명도 선보였다. 미래에는 더는 글을 읽거나 쓰지 않고, 글은 녹음으로 대체되리라고 말이다. 트랜지스터 전축 시대 맥루언의 상상은 녹음에 머물렀지만, 이후 멀티미디어의 확장도 그의 예견 안에 있는 셈이다.
탈문자 사회에 대한 불안한 전망이 제법 많다. 맥루언처럼, 캐나다의 문학자 브루스 포는 문해력이 쇠약해질 때 탈문자 사회가 되고 여기서 독자, 작가, 책이 사라지고 나면 비판적 사고나 저항이 어떻게 가능하겠느냐고 되묻는다. 불안과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문해력을 독해력으로 이해하는 세대에 나도 속하니 말이다. 그러나 X세대 아빠, Y세대 엄마 사이에서 난 Z세대 딸을 소재로 방영 중인 자동차 광고 영상이 떠오른다. Z세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에 태어났으니 많아야 20대 초반, 보통 보습학원에 다니며 어른이 정해준 문해력을 배우는 청소년들이다. 이들은 유튜브 15분도 길다 여기고, 틱톡 15초 영상에서 그들의 몸짓 언어로 한창 소통하는 중이다.
기성세대가 기를 쓰고 배워야 할 갖가지 문해력을 마치 타고난 이해력처럼 자연스럽게 터득한 이들은 말 그대로 글로벌하다. 11월 초 미국 대선 관전 포인트의 하나도 Z세대가 얼마나 투표할지라고 한다. 현대 미국 역사상 가장 정치의식이 높고 진보적인 세대라 그렇단다. 그래서 넘치는 문해력 시리즈는 어쩌면 IT 시대 이전에 태어난 기성세대의 불안과 잘하고 있는 자식 세대에게 그들이 쌓아 올린 방어벽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분명한 건 지금 문해력의 요구가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따위 문맹 퇴치 운동의 속편이 돼서는 안 된다는 점이겠다.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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